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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신종 갑질 … 열혈 노인들, 콜센터 피말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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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손님이라는 지위를 악용해 직원에게 일방적인 폭언과 폭력을 행사하는 이른바 ‘갑질’ 논란은 한국만의 얘기가 아니다. 일본에서도 잇따르는 갑질 논란에 일본 기업의 전통이던 ‘손님은 신’이라는 관념에 대한 재검토가 이뤄지고 있다고 경제 주간지 닛케이비즈니스(日經ビジネス) 최신호가 보도했다.

 잡지에 따르면, 오사카(大阪)부 이바라키(茨木)시에 있는 한 편의점에는 오후 10시부터 오전 5시까지 경비원이 출근한다. 손님을 응대하는 것이 아니라 ‘유사시’ 점원을 보호하는 게 그의 임무다.

 이 편의점이 경비원을 고용한 것은 지난해 벌어졌던 ‘도게자(土下座)’ 사건 때문이다. 도게자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사죄하는 행위를 말한다. 상대의 인권을 무시하는, 야만적이고 잔인한 행위로 인식돼 도게자를 강요하는 것은 상대에게 모욕을 주는 행위로 여겨진다.

 그런데 지난해 9월, 이 편의점에서 남녀 4명이 점원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생트집을 잡고 소란을 피우며 직원들에게 도게자를 강요 했다. 이들은 이런 전 과정을 동영상으로 찍어 인터넷에 올렸고, 결국 이 영상이 논란이 돼 이들에게는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의 형사처벌이 내려졌다.

 여기에 얼굴을 맞대는 직원들뿐 아니라 전화로 고객을 상대하는 직원들의 스트레스도 쌓여가고 있다. 최근에는 고함을 치거나 폭언을 하는 전통적인 방식의 갑질이 아니라 조곤조곤 따지면서 직원들 피를 말리는 ‘신종 갑질’이 유행하고 있다. “내가 해 봐서 아는데…”라거나 “내가 책임자로 있을 땐 말이야…”라는 식으로 시작해 몇 시간 동안 전화기를 붙잡고 직원들을 괴롭히는 방식이다.

 지난해 여름 한 건강 장비 업체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60대 후반의 남성이 “한 달 전 구입한 혈압계가 고장”이라며 불만을 제기했다. 상담원은 사과를 하고 “택배비만 부담하면 새 제품으로 바꿔주겠다”고 했다. 일주일 후 전화가 다시 걸려 왔다.“상품은 잘 받았습니다. 그럼 왜 불량품이 발생한 것인지 원인을 파악해서 보고서를 제출해 주세요.”

 그 남성은 과거 한 제조업체의 품질보증부서 책임자를 지냈다. 상담원의 자세한 설명에도 “그런 품질 관리는 있을 수 없다” 는 식으로 물고 늘어졌다. 몇 시간의 통화 끝에 겨우 납득시켰는가 싶었는데, 그는 “이제 향후 대책을 정리해 보자”고 말을 이었다.

 잡지는 이런 현상의 원인 중 하나로 ‘건강하면서 고독한 노인’의 증가를 꼽았다. 콜센터 전문지 릿쿠텔레콤의 지난해 조사에 따르면, 기업 콜센터에 전화하는 사람의 35.8%가 60대 이상이었다. 한 기업 관계자는 “과거 노인들보다 건강한데다 특히 남성들의 경우엔 회사 이외의 생활은 모르다 보니 은퇴 후 할 일도, 갈 곳도 없다”며 “주체하지 못하는 에너지를 고객 상담 창구에 발산한다”고 말했다.

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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