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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슈 인터뷰

"맥아더가 남침 막아준 고마움 잊으면 안 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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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로버트 김(오른쪽)과 부인 장명희씨가 8일 오후 미국 버지니아주 자택에서 본지 기자와 단독 인터뷰를 하고 있다. 워싱턴=김종혁 특파원

로버트 김이 한국 국민께 보내는 감사의 글과 친필 서명.

로버트 김. 한국명 김채곤(65). 어쩌면 한국인은 누구나 그에게 빚을 졌는지 모른다. 미 해군정보국(ONI)의 잘나가는 컴퓨터 분석관이던 그는 1996년 9월 주미 한국대사관이 주최한 국군의 날 행사장에서 미 연방수사국(FBI)에 의해 체포됐다. 국방기밀 취득 음모죄. 당시 주미대사관 해군 무관이었던 백동일 대령에게 미 정부가 갖고 있는 북한에 대한 비밀 정보를 건네줬다는 혐의였다. 법리상 음모죄는 단독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음모를 꾸민 공모자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다른 당사자인 백 대령은 본국 송환됐고, 한국 정부도 입을 닫았다. 결국 미 시민권자인 김씨만 법정에 섰다. 징역 9년의 실형에 보호관찰 3년. 아버지가 한국은행 부총재에 한국경제인연합회 상임 부회장을 지낸 유복한 집안 출신에다 동생은 국회의원(김성곤 의원)이고, 본인 역시 미국에서 성공한 한국인이었던 김씨는 졸지에 수감자로 전락했다. 수형번호 49756-083. 번호표 달린 죄수복을 입고 김씨는 마피아 두목, 살인, 강도, 강간범이 득시글거리는 펜실베이니아의 앨런우드 교도소에서 만 7년을 보냈다. 김씨는 5일 비로소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됐다. 모범수로 가석방돼 버지니아주 매나사스 자택에서 보호관찰자로 생활하던 그에게 법원이 '보호관찰 집행정지'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8일 쏟아지는 장대비를 맞으며 찾아간 취재진을 김씨는 "우리집은 이제 활짝 열려 있다"며 함박꽃 같은 웃음으로 맞았다. 그는 오랜 수형생활과 60대 중반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건강해 보였다. 김씨는 "교도소 안에선 운동밖에 할 게 없었다"며 웃었다. 그러더니 "국민의 성원이 없었으면 제가 어떻게 버텼겠느냐"며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나를 애국자니 영웅이니 하면서 부각시키는 건 바라지도 않을뿐더러 옳지도 않다." 김씨는 담담히 말했다.

-당시 백 대령에게 넘긴 비밀 정보가 30여 건이라고 보도됐는데 정확히 얼마나 되나.

"(웃으며) 아마 그보다 두 배는 많을 것이다. 내 책상의 컴퓨터에서 출력해서 표지에 적혀 있는 '극비(Top Secret)''비밀(Secret)''대외비(Confidential)'라는 글자들은 지워버리고 백 대령 집에 편지로 보냈다. 나중에 보니 FBI가 우체국에서 편지를 몰래 뜯어봤는지 내용을 다 알고 있더라. 백 대령과의 전화 감청 녹음 테이프도 있었다."

-무슨 내용인가.

"북한에 대한 것이다. 북한군의 동향과 훈련 실태, 북한 주민들의 생활상, 북한이 거래하는 마약과 위조지폐 제작 실태 등이다. 96년에 북한 잠수정이 강릉에 침투했을 때는 잠수정의 침투 경로를 전화로 알려줬다. 그때 침투한 잠수정은 한 척이 아니라 두 척이었다. 미국이 어떻게 그런 걸 알고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사무실 컴퓨터로 검색해 보니 그런 자료들이 다 있었다."

-왜 그런 정보를 한국 측에 줬나.

"안타까워서다. 미 정부는 북한에 대한 정보를 다른 앵글로색슨 국가들(영국.캐나다.호주 등)에는 제공해 줬다. 그러나 정작 그것이 가장 필요한 한국은 그런 정보가 있는지조차 몰랐다. 당시 북한은 휘청거리는 상황이었다. 나는 이런 정보가 전달돼 한국이 북한의 붕괴 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통일을 준비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후회하지 않나.

"FBI 수사관이 나에게 '당신은 미국 시민권자가 아니냐'고 묻더라. 그래서 '한국과 미국이 축구를 하면 난 한국을 응원한다. 미 시민권자지만 조국은 한국이다'고 답변하니까 '이해할 수 있다'며 고개를 끄덕이더라. 비슷한 상황이 온다 해도 난 한국을 위해 뭔가 했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현명하게 처신했을 거다. 비밀정보를 빼내 건네주면서도 겁은 났지만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법을 잘 몰랐고, 너무 순진하고 어리석었다."

-수감 생활이 꽤 고통스러웠을 텐데.

"처음 잡혀갔을 때 구치소에서 옷을 모두 벗기고 종이옷을 입히더라. 너무 추워 덜덜 떨었다. 재판이 길어지고 무기징역이니 하는 말이 나올 때 세면대와 화장실의 쇠창살에 머리를 들이받아 자살할 생각도 했다."

-수형 생활을 어떻게 했나.

"아들뻘 되는 간수들이 '헤이'하고 부르면 '예스, 서"라고 대답해야 한다. 어쩌다 '마이 네임 이즈 낫 헤이'(내 이름은 헤이가 아니야)라고 하면 '왓'(뭐야) 하며 인상을 쓴다. 면회를 할 때마다 옷을 발가벗겨 몸수색을 하는데 너무 모멸스러워 가족들한테 차라리 면회를 오지 말라고 했다. 교도소에선 노역을 하는데 처음엔 치과의사 보조를 했다. 그런데 흉기로 사용될 수도 있는 치과도구를 누가 훔쳐가는 바람에 보조원들 모두가 교도소 영창에 보내졌다. 거기서 마피아 두목과 아래 위 침대를 썼다. 아주 점잖은 이탈리아 출신인데 나중에 보니 교도소 내에서 부하들이 호위를 해 다니더라."

-다른 일은 하지 않았나.

"대학 3학년이던 딸에게 컴퓨터를 사주고 싶어 2주일에 40달러를 주는 목재공장반에 들어갔었다. 하루 여덟 시간 일을 하는데 오전 10시와 오후 3시에 10분씩 휴식시간이 있고 나머지 시간은 계속 서 있어야 한다. 내 나이가 예순이 가까울 때인데 결국 몇 달 못했다. 그 뒤 교도소 내 중국인과 남미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 노릇을 출소할 때까지 했다. 나중엔 한 달 월급이 100달러쯤으로 올랐는데 '북한 빵공장'에 보냈다."

-북한 빵공장이라니.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어떤 단체가 북한 아이들에게 줄 빵공장을 세운다는 소식을 듣고 교도소 측에 얘기해서 매달 월급 일부를 성금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또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는 수업시간에 학생 재소자들과 함께 교실에 있는 TV로 한국팀 경기를 몰래 시청하다 교도관들에게 TV를 빼앗긴 일도 있다. 98년 아들 결혼식 때는 교도소 측이 '참석하려면 죄수복 입고 수갑 차고 나가라'고 해서 포기했다. 아비로서 정말 가슴 아팠다. 대신 내가 좋아하는 찬송가를 결혼식장에서 연주해 달라고 했는데 사정을 아는 하객들이 울음을 터뜨려 눈물바다가 됐다고 하더라."

-격려 편지도 많이 받았을 텐데.

"다 합쳐 몇 상자 분량을 받았다. 받은 편지는 다 답장을 해드렸다. 한국의 무기수 2명과는 몇 년째 서로 격려 편지를 나눴다."

-한국에선 반미 감정이 적지 않다. 한편에선 '로버트 김을 구속한 미국은 나쁘다'는 논리를 펴기도 하는데.

"내 이름이 반미에 사용된다면 적절치 않아 보인다. '반(反)'이란 말을 어떤 나라 앞에 붙이는 것 자체가 그렇다. 반중이나 반일, 반북한도 모두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 나라의 특정 정책이나 정권이 싫을 수는 있어도 나라 자체를 반대하는 건 옳지 않다. 최근 맥아더 동상 철거 논란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맥아더가 남침을 막아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누리고 있는 게 아닌가. 우리가 좀 커졌다고 과거의 고마움을 잊으면 안 될 것 같다."

-미국이 밉지 않은가.

"미국 사회는 갈수록 각박하고 이기적이고, 정과 인간미가 없어지고 있다. 한국식의 훈훈한 인간관계가 더 낫다고 본다. 하지만 미국이 미울 건 없다. 한데 우리 청소년들이 미국이나 외국 것이라면 무조건 좋다고 받아들이는 건 걱정이다. 미국에 오래 살아본 내가 할 수 있는 얘기는 우리것에 좋은 게 많다는 거다. 그걸 청소년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만난 사람 = 김종혁.강찬호 워싱턴 특파원

*** 로버트 김 약력

1940년 1월 부산 출생

1958년 경기고등학교 졸업(54회)

1964년 한양대학교 산업공학과 졸업

1966년 도미, 미국 인디애나주 퍼듀대학원 입학

1967년 장명희 여사와 워싱턴 주미 대사관저에서 결혼

1970년 미 항공우주국(NASA) 취직, 4년 근무

1974년 미 시민권 획득

1978년 미 해군정보국(ONI) 취업, 19년간 컴퓨터 전문가로 근무

1996년 9월 미 연방수사국(FBI)에 스파이 혐의로 체포됨

1997년 7월 간첩음모죄로 9년 징역 및 보호관찰 3년 선고받고 펜실베이니아주 앨런우드 교도소에서 복역 개시

2003년 7월 로버트 김 후원회(회장 이웅진) 발족

2004년 1월 버지니아주 윈체스터 교도소로 이감

2004년 2월 부친 김상영옹 별세(향년 90세)

2004년 6월 복역 7년 만에 가석방돼 가택수감

2004년 6월 모친 황태남 여사 별세(향년 83세)

2004년 7월 가택수감 해제. 보호관찰 3년 남음

2005년 8월 버지니아 동부지법에 보호관찰 집행정지 신청

2005년 10월 5일 미 법원, 보호관찰 집행정지 결정.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