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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식의 야구노트] 10구단 kt 성적, 조범현 수첩에 답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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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일본 스프링 캠프에서 선수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조범현 kt 감독. [사진 kt 위즈]

프로야구 감독에게 매우 어려운 일이 표정관리다. 한 경기에 위기와 기회가 수십 번 교차하는데, 잘 풀리지 않는다고 1980년대 몇몇 감독들처럼 물건을 던지거나 욕을 했다간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을 것이다. 감독이 살짝 흔들리면 선수들은 크게 휘청거린다.

 뼈아픈 실점을 하거나 어이없는 실책이 나와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감독들이 있다. 김성근(71) 한화 감독과 조범현(55) kt 감독, 염경엽(47) 넥센 감독은 항상 침착하고 냉정하다. 바위처럼 단단한 그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중요한 순간, 특히 위기 때마다 수첩에 뭔가를 적는다는 것이다.

 김 감독은 위기관리의 대가다. 팀이 어려움에 빠지면 TV 카메라는 그의 표정을 잡는다. 그때 김 감독은 일부러 더 냉정한 표정을 짓고 수첩에 뭔가를 쓴다. 위기 이후를 대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프로야구 경기장에는 국회만큼이나 많은 카메라가 감독을 쫓아다닌다. 그러나 김 감독 몰래 수첩 촬영에 성공한 사진기자는 없다. 더그아웃 뒤에는 카메라가 위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수첩에 담긴 내용이 몹시 궁금해서 조금만 보여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그가 살짝 공개한 페이지엔 각종 숫자와 일본어가 불규칙하게 나열돼 있었다. 봐도 소용없는 암호 같았다. 다른 페이지를 열어 보니 경기일지가 보였다. 라인업뿐 아니라 심판 네 명의 이름까지 써 놨다. 김 감독은 전력분석팀으로부터 많은 자료를 받아 보고도 자신만의 자료를 따로 만들었다. 각 심판의 판정 성향까지 변수에 넣은 것이다. 일흔 살이 넘어 한화 지휘봉을 잡은 김 감독은 다시 수첩을 꺼냈다. 일본 스프링캠프에서 선수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관찰하며 기록 중이다.

 신생구단 kt는 캠프 시작에 앞서 스태프 전원에게 태블릿 PC를 나눠줬다. ICT(정보통신기술) 기업의 야구단답게, 각종 데이터를 중시하는 조 감독 스타일에 맞춰 구단이 나서 인프라를 구축한 것이다. 조 감독은 태블릿 PC를 열심히 활용하고 있지만 한 손엔 여전히 수첩을 들고 있다.

 조 감독은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부터 메모를 해 왔다. OB 포수였던 그는 동료 투수들을 리드하기 위해 자신이 보고 느낀 걸 기록하기 시작했다. 프로 선수가 볼펜과 수첩을 끼고 사는 건 당시엔 낯선 장면이었다. 조 감독은 “특히 포수는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투수의 신뢰를 받으려면 포수가 투수를 잘 파악해야 하니까”라고 말했다.

 그는 20여 년간 쌓은 노하우를 모아 2006년 포수 관련 소책자를 내기도 했다. 2003년 SK 감독으로 부임한 후 그의 수첩은 상대 팀에 대한 정보로 꽉 찼다. 자리가 바뀌었어도 그는 볼펜을 놓지 않았다. 눈으로 보고, 영감을 얻고, 손으로 기록하는 게 진짜 자산이 된다고 믿어서다.

 두 선배를 잇는 지장(知將)으로 평가받는 염 감독도 메모광이다. 그가 수첩을 끼고 다닌 건 1996년 현대 신인 유격수 박진만(39·SK)에게 주전 자리를 내준 뒤부터다. 벤치로 밀려난 자신의 처지가 괴로웠지만 이때부터 야구를 깊이있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대주자로 나서는 짧은 순간을 위해 긴 공부를 한 것이다. 2001년 은퇴 후 코치와 운영팀장 등 다양한 역할을 하면서도 그는 메모하는 습관을 유지했다. 2012년 넥센 감독이 된 뒤 수첩 내용은 더 풍성해졌다. 야구뿐 아니라 리더십·철학 등에 관한 금언이 담겨 있다.

 일본 프로야구의 명장 노무라 가쓰야(80) 전 라쿠텐 감독은 선수 시절부터 쓴 메모를 모아 『노무라 노트』등 10여 권의 책을 냈다. 연습생에 불과했던 노무라가 최고의 타자가 되고 감독이 된 건 보고, 쓰고, 공부한 덕분이라고 한다. 그들이 처음부터 특별한 내용을 썼던 건 아니다. 뭔가를 자꾸 쓰면서 그들은 특별해졌다.

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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