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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종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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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소설『기막힌 신세계』>
주옥같은 피아노소곡이라면 누구나 제일 먼저 손꼽는게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일 것이다. 언제들어도 사랑하는 계절의 감미롭고 추억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그게 요새는 이만저만 지겨워진게 아니다. 누구의 착상인지 자동차가 후진할 때면 요란스레 『엘리제를 위하여』가 울려 퍼지게 만들었다. 음악이 경적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런 얘기가 있다.
보모는 생후 8개월의 아기들에게 장미꽃과 그림책들을 주었다. 아기들은 장미꽃잎을 뜯고, 그림책을 구겨가며 즐거워 했다. 그러자 보모는 특수장치의 스위치를 꽂았다. 그러자 심한 소음이 일어나고, 이 소리에 겁에 질린 아기들은 요란하게 울어댔다.
보모는 이러기를 2백번이나 반복했다. 그러자 아기들은 꽃과 책을 보기만해도 공포와 증오가 뒤섞인 표정을 짓게 되었다. 그것은 조건반사를 이용해서 일밖에 모르는 노동자감이 되도록 아기들을 훈련시키는게 목적이었다.
「올더즈·헉슬리」의 미래소설 『기막힌 신세계』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이 소설이 나온지 꼭 반세기가 지난 오늘 우리는 바로 그 기막힌 신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여러해전에 일본의 어느 대학에서 대판공항주변에서 태어난 아기들을 상대로 실험을 한적이 있다. 이 지역에 임신5개월 전부터 살고 있는 어머니 배에서 나온 아기들은 심한 항공기소음속에서도 잘 잤다.
그러나「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합창』을 들려주자 20명중의 15명이 잠을 깨고 보채기 시작했다. 13명은 비명에 가까운 울음을 터뜨렸다. 이미 아기들의 음에 대한 감각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뒤늦게나마 환경청에서는 공항을 이용하는 항공기들에서 소음세를 받고 그 돈으로 공항주변의 소음해소에 쓰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하늘높이 방음벽을 쌓지 않고 제트기 소음을 막을 길이 있을까?

<뒤늦은 공항 소음세>
소음이 일어나면 인체는 혈관수축반사작용을 일으킨다. 그것은 소음의 압박에 대하여 인체가 자동적으로 대응하는 수단의 하나다.
그러나 이 때문에 심장의 고동의 리듬이 깨지고 심장 자체에 위협을 준다. 또 소음은 동맥믈 막히게 하고 콜레스데롤을 혈액속에서 늘리고 혈압을 높인다.
소음을 뇌에서는 이와 반대로 혈관을 확대시킨다. 그래서 두통이나 멀미를 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두통 정도로 끝날 일이라면 아스피린이라도 먹으며 얼마든지 견딜수 있다. 소음은 그렇게 만만치가 않다.
1969년에 영국에서 소음에 관한조사를 했다. 그랬더니 런던의 히드로공항 근처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공항에서 멀리 떨어진 조용한 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보다 더 많이 정신적 장해로 시름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뉴욕의 케네디공항주변에서도 같은 사실이 밝혀졌다.
소음공해는 공항근처에서만 심한게 아니다. 언젠가 서독의 철강노동자에 대한 조사결과가 보도된 적이 있다. 여기에 의하면 시끄러운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조용한 작업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보다 고집이 세고 무뚝뚝하고, 남을 믿지 않고, 또 매우 편협하여 남과 싸우는 율도 훨씬 높다. 그런 노동자가 지쳐서 집에 돌아와도 여전히 거슬리는 것 투성이다. 자연 가정불화가 잦게 된다.
『핏대난다』는 표현이 왜 서울에서 생겼는지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왜 서울사람들이 사소한 일에도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자주 실랑이를 벌이게 되는지도 알 것 같다. 또 하나 왜 우리들의 말소리가 다른나라 사람들보다 높고 거친지도 알만하다.
텔리비전을 보면 뉴스해설할 때나, 좌담회에서나 모두 음성이 높다. 드라머속에서도 툭하면 등장인물들이 언성을 높인다.
그러지 않아도 한국인의 목소리가 서양사람 듣기에는 조금 거칠고 아담하지 않은 점이 있는 것 같다고 「리처드·러트」가 10여년전에 지적한 적이 있다. 그게 그 후 더 거칠어지고 음량도 늘었다.
다름아니라 그것은 롬바드반사작용 탓이다.
소음속에서는 크게 말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다. 가령 다방속에서 음악소리가 크면 클 수록 사람들의 대화소리는 커지게 마련이다.
한쪽이 크게 말하면 대답하는 사람의 음성은 덩달아 커진다. 이런게 버릇이 되면 보통 때에도 큰 음성이 나온다.

<한국인의 큰 소리>
소설 『기막힌 신세계』에서는 모두가 기계처럼 양순한 노동자가 된다. 소음속에서 자란 우리는 무슨 괴물로 바뀌어져 가며 있을까 짐작이 갈만도 하다.
환경청은 9월부터 교회가 새벽에 종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규제했다. 이를 보고 마치 대단한 일이라도 한 것 처럼 각 신문들은 보도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끔찍한 소음들은 얼마든지 많다. 우리네 육체와 정신을 병들게 만들고 있는「들리지 않는 소음」도 많다.
1초동안에 20회이하로 진동하는 저주파는 귀에 들리지 않는다. 가령지하철의 전동차가 지나갈 때 일으키는 진동 소리, 대행트럭의 엔진소리, 공장안의 대형송풍기가 가동하는 소리등은 그저 느낄 뿐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까닭 없이 귀가 멍멍해지고, 숨이 담답해지고, 깊은 잠에 들지 못하고, 심한 두통에 걸리게 만드는 것은 대부분이 이런 저주파의「들리지 않는 소음」들이다. 강변도로나 고속도로변의 고층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을 가강 괴롭히는 것도 이런 소음이다.
『죽느냐 사느냐 할 때에는 짐슴들은 천부의 능력으로 공포에 대응해 왔다.
그러나 이런 때에는 육체는 값진희생을 치러야 한다.
따라서 만성적으로 이런 상태, 곧 소음공해가 계속되면 육체는 결딴나게 마련이다』
이렇게 프린스턴대학의「실번·톰킨즈」박사가 경고한 적이 있다.
그는 암암리에 이른바 「정신적 살인범」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고 말하려한 것이다.
만약 시끄러운 길이 먼저 생기고 그 다음에 고층아파트가 길가에 세워졌다면 「정신적 살인」의 하수인은 건설업자가 된다. 그리고 아파트건설을 허가한 사람은 정신적살인의 교사범이 된다. 만약 또 기왕에 세워진 아파트단지 앞뒤로 고속도로를 만들게 한다면 이번에는 도로를 만든쪽에 모든죄가 돌아간다.
『건강한 짐슴이 아니라 아름다운 인간답게 살수 있도록 하자』고 어느 이탈리아의 건축가가 주장한 적이 있다. 아름다운 인간은 고사하고 건강한 짐슴처럼만이라도 살수 있으면 좋겠다는게 우리의 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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