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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8) 제79화 육사졸업생들(181)-재건국민운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9기 대표 강상욱중령은 혁명 직후 9기 소외에 실망, 박정희소장에게『군으로 돌아가겠다』고 청원했다고 한다.
박소장은『기왕에 나왔는데 일을 해야지 군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무슨 소리냐』고 만류하고는『강중령이 평소 얘기하던 범국민적인 개혁운동조직을 구상해 보라』고 새로운 임무를 주었다.
강중령은 마음을 돌려 범국민 혁신운동 조직구상에 착수했다.
당시 공무원교육원(현 천도교본부자리)에 몇사람의 요원을 데리고 합숙하면서 10여일 만에 운동방향·조직원칙·기구 등 시안을 작성했다.
이것이 바로 재건국민운동의 시발이 된 것이다.
박소장이 강중령에게 이 임무를 특별히 맡긴 것은 거사모의 과정에서 강중령이 늘 국민개혁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강중령의 시안은 6월10일 최고회의에서「재건국민운동에 관한 법률」로 통과돼 조직이 착수됐다.
이 법은 주로 ▲용공중립화 사상의 배격(나중 승공민주이념의 확립으로 개정) ▲내핍생활의 여행 ▲근면정신의 고취 ▲생산 및 건설의식의 증진 ▲국민도의 앙양 ▲정서관념의 순화▲국민체위향상 등을 범국민운동화 한다는데 골자를 두었다.
기구로는 중앙에 본부를 두고 도에 지부, 시·군과 읍·면·동에는 촉진회를 두었다.
그 아래 각 마을단위로 재건청년회와 재건부녀회를 두어 실전운동의 앞장에 서도록 했다.
도지부위원장은 도지사가, 시·군과 읍·면·동 촉진회 위원장은 시장·군수와 읍·면·동장이 겸임하도록 되어 있었다.
입안자인 강중령은 이재건국민운동이 관주도의 생활의식 개혁운동이며 새마을운동의 전신이라고 말한다. 이같은 운동은 원칙적으로 민간에서 자체적으로 일어나야 하나 당시 우리나라 사회여건상 관주도가 불가피했다고 한다. 또 그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중간초직은 지방행정기구로 대치했다는 것이다.
강중령은 조직이 착수되면서 지방의 어느 한곳을 맡아 일선에서 시범을 보이겠다고 자원, 서울시지부장을 맡았다고 한다.
강중령 말고도 최명헌중령이 충남지부장으로, 김유성중령이 전북지부장으로 참여, 재건국민운동에서 9기생들은 큰 역할을 했다.
초대 재건국민운동 본부장에는 유진오박사가 선임됐는데, 이 인선은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한 것 같다고 강중령은 말한다.
현 국회의장인 채문식씨도 당시 중앙본부의 계몽국장(나중 운영부장)으로 재건국민운동에 참여했던 인사다.
유진오박사는 3개월쯤만에 사의를 표해 후임에 유달영교수가 취임했다. 유교수 초빙은 강상욱중령의 건의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강중령은 사전에 유교수의 의중을 떠보기 의해 유교수를 찾아갔는데『나같은 사람이 뭘…』하는 반응이었다는 것이다. 강중령은 의사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돌아와 박소장에게 유교수를 초치해 직접 부탁을 드리는 예의를 갖추도록 건의, 유교수를 모셔왔다고 들었다.
강중령은 혁명 3개월 만인 8월15일 대령으로 진급했다. 9월4일 최고회의 개편때 9기를 대표해 최고위원에 보선됐다. 서울지부장 자리를 내놓고 최고회의에서 국민운동 공보담당으로 일할 때였다.
그러나 국민운동 서울지부장직을 맡았던 인연으로 나중 서울에서 국회의원에도 출마하고 공화당 서울시당위원장직도 맡았던 것이다.
재건국민운동은 재건체조·국민가요보급·저축장려·간소복 착용·자매부락 자매학교 결연운동과 국산품애용·가족계획·문맹퇴치·절미운동·시간지키기·자전거타기운동 등 수십가지 국민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1년만인 62년 가을쯤부터 이 운동을『관주도에서 민간주도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강중령은 이는 김종필씨가 은밀히 추진하던 공화당 사전조직과 관련된 의도적인 여론조성이었다고 말한다.
농촌 등 일선의 일꾼들을 공화당조직에 흡수하려다 보니 국민운동 조직과 마찰이 생겼고 결과적으로 국민운동조직이 변질되고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재건국민운동은 박의장의 지시에 따라 결국 1년 만에 민간운동으로 전환했다가 곧 해체되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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