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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가장, 설자리가 없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아내는 자녀의 학교생활에 지나친 신경을 쓰고 있으며 나의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다 얼마전 직장까지 그만 두어 무능력에 대한 면박까지 대단했읍니다.어느날 혼자 집을 나오고 말았는데, 갈곳없는 신세긴하지만 그래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직장상사와의 불화도 그렇지만 집에 들어가서도 위안은커녕 불화만이 생기고 있읍니다. 6개월전부터는 심한 두통으로 시달리고있어요. 사흘정도 무단결근을 하고 여행해보면 그때는 머리가 맑아지는듯 하나 계속 결근할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또 한번 무단결근을 하고 보니 자꾸만 결근하고 싶은 생각뿐입니다. 물론 제자신에게 큰 문제가 있는것 같습니다만….』 「6년간 해외근무로 집을 떠나 있었지요. 지난 연초에 돌아와 보니 떠날때 국민학교 6학년이던 딸 아이가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 있었습니다. 행동거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 타이르면 들은체 하지도 않아요. 한창 자라는동안 생활을 함께 하지않아 그런지 말을 들으려하지 않습니다. 정말 어떻게해야 내가 아버지로서, 또는 남편으로서의 권위를 회복할수 있을지요.』 『3년전 정년을 4년정도 앞두고 퇴직한 50대 남자입니다. 그동안 아내가 상업을 해 그럭저럭 가계를 꾸려가고 있읍니다만, 집안에서의 내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직장에 다닐 때는 회사일로 바쁘기만 해 집안식구와의 다정한 접촉이 드물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보이지않는 간격을 만들어버린것 같아요. 사회에서도, 집안에서도 외톨이 되고 말았읍니다.』
서울 영등포YMCA 정신건강 상담실과 「생명의 전화」등을 찾는 가장들의 고민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샐러리맨이나 가장의 입장으로서 상담창구를 찾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변모하는 현대가정에서 가장으로서의 남편은 권위의 상실과 더불어 가정내·외적인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다.
81년 리스PR의 경제조사연구소가 주부 9백3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의식조사에서 한국 도시가정의 식단은 가구주의 식성 위주보다는 가족전부의 식성에 맞게 꾸며지고, 중요한 가사결정권은 주부가 단독으로 행사하는 경우가 많다고 밝힌바 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가장은 이미 옛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남자들은 무서운 경쟁에서 생존하기 위해 직장에서 전력을 다해야 한다. 그래서 집에오면 심신이 피로하여 충분한 휴식을 요구하게 된다. 옛날에 망치를 들고 못질하는것은 남자가 했으나 이것도 점차 여자의 일이 되어가며 전기기구를 만지는것도 근래에는 여자가 하게되었다. 동사무소에 나가 증명을 떼는일, 은행에 출입하는 일, 세무서·우체국등 모든 출입이 여자의 일이 되어 버렸다. 자녀의 교육도 어머니가 주로 담당하게 되어 최근에는 물리적인 아버지는 있어도 심리적인 아버지는 없게 되었다』고 이광규교수(서울대·인류학)는「변천하는 가족관계」라는 논문에서 밝히고 있다.
국립정신병원장 김철규박사는 요즘 가장은 옛날에 비해 스트레스의 요인이 많아 보다 많은 휴식과 안식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말한다.
성실하게 일하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실 떨어진 연처럼 의욕을 상실하거나, 회사에 나가지 않고 며칠간 어디로 증발해 버리는 어른판등교거부증등이 스트레스의 영향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대인의 정신질환 증후군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이같은 증세가 옛날에도 없었던것은 아니나 현대의 가장 가운데는 옛날에 비해 보다 복합적인 요인이 많으며 이로 인해 다양한 증상을 보이고 있다는것. 가출도 그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현대의 어성들은 중년부터 좋아진다는 말이있다. 이와 대비되는 말로 현대의 남성들은 중년부터 어려워진다는 말이 성립한다.
여성들은 자녀교육이 어지간히 끝난 중년부터 새로운 미지의 세계에 발을 디뎌 놓을 기회가 점차 확대되어 가고있다.
그러나 남성의 경우 40만 지나면 우울한 현실에 부딪치게된다. 직장인의 경우 계속 성장이냐 도태냐하는 문제가 시작되며 따라서 직장에서는 상사의 눈치를, 집안에서는 아내와 자녀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
40이 갓 넘으며 흰머리가 생길 정도로 어렵게 일해왔으나 『아빠는 돈이나 벌어오는 사람』정도의 인식 이외에 더 이상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어느 조사에서 남성들은 39%가 주말에 집에서 낮잠 즐기는것을 좋아한다고 나왔다. 아직 레저시설이나 레저를 즐길만한 여건이 되지 않아 그렇다고 풀이되나 주말에 낮잠을 자는 가장에게서 우리는 피곤한 체념을 읽을수도 있다.
미래에 당연한 귀결로 나타날 남녀평등사회, 그러나 현대의 가장은 전통적인 가부장제도에서 자라 불과 반세기도 못미쳐 엄청난 의식의 변화를 겪어야만하기 때문에 더욱 피근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김징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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