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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액권 발행 더 이상 미루지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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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한국은행이 국정감사 자리에서 고액권 도입이 시급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경제 규모가 커짐에 따라 고액권 발행의 필요성이 절실해진 것은 물론 그에 따른 직.간접적인 경제 효과가 크다는 점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결정 권한을 가진 정부는 여전히 유보적이다. 화폐단위변경(리디노미네이션)이나 고액권 발행 모두 부작용이 크다며 어느 쪽도 검토한 바가 없다는 것이다. 정부는 연초에 화폐제도는 변경하지 않고 다만 위폐 방지를 위해 현재의 지폐 도안만 바꾸기로 입장을 정리했다. 그럼에도 한은이 고액권 도입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강조한 것은 이를 더 이상 늦추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지폐 도안만 바꾼 뒤 나중에 따로 고액권을 발행하는 것은 이중의 낭비라는 지적도 있다.

현재의 최고액권인 1만원권이 도입된 것은 32년 전인 1973년이다. 그동안 경제 규모는 비약적으로 커졌고 물가 또한 크게 올랐다. 1만원권만으로는 정상적인 상거래가 불가능할 지경이다. 그 결과 10만원짜리 자기앞수표가 사실상 지폐처럼 통용되고 있다. 10만원권 자기앞수표의 연간 발행비용만도 4000억원이 넘는다. 자기앞수표의 발행과 유통에 따른 불편과 시간 낭비는 돈으로 따지기 어려울 정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최고액권은 평균 37만원에 이른다. 전 세계 212개국 가운데 최고 액면가가 우리나라보다 낮은 나라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29개 최빈국뿐이다. 경제 규모에 맞추어 고액 단위의 화폐가 필요한 것이다.

정부는 고액권을 발행하면 부정부패가 만연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고액권의 액면가가 우리보다 높은 선진국들이 다 부패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부패 문제를 화폐제도로 해결하려는 발상 자체가 후진적이다.

우리는 이미 고액권 도입을 여러 차례 촉구한 바 있다. 상공회의소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민의 81.3%가 고액권 도입에 찬성하고 있다. 고액권 발행은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다. 기왕에 발행할 것이라면 10만원짜리 수표를 대체할 10만원권이 합리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