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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 땐 내게로 와 꼬옥 안아줄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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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북미 개봉 당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인터스텔라’를 누르고 박스오피스 정상에 올랐던 디즈니 애니메이션 ‘빅 히어로’(원제 Big Hero 6, 1월 21일 개봉, 돈 홀·크리스 윌리엄스 감독). 이 영화를 푸짐한 몸매의 바람 인형과 소년의 우정 이야기인 줄로만 예상했다면 딱 절반만 맞춘 셈이다. 디즈니의 감성이 마블 코믹스 세계와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빅 히어로’는 그 궁금증에 대한 흥미진진한 결과물이다.

평소 애니메이션 장르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디즈니표 애니메이션을 보는 게 하품 나올 정도로 지루했던 경우는 흔치 않다. 디즈니는 재미와 감동을 버무린 가족영화라는 목표치에 거의 늘 모자람 없이 도달한다. ‘애니메이션 명가’라는 수식이 괜히 붙는 게 아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전과 비교해 그 행보가 더욱 탄탄해졌다. 정확하게는 픽사와 마블이라는 거대 브랜드와 합병한 직후부터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는 전에 없던 변화의 기운이 감지됐다. 기술과 콘텐트가 눈에 띄게 확장되기 시작한 것이다. ‘라푼젤’(2011, 네이슨 그레노·바이론 하워드 감독)은 디즈니의 전통이자 장기인 동화와 최신 기술인 3D의 만남이었고, ‘주먹왕 랄프’(2012, 리치 무어 감독)는 디즈니 브랜드 애니메이션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픽사 특유의 위트가 더 짙게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전 세계를 열광케 한 ‘겨울왕국’(2013, 크리스 벅·제니퍼 리 감독)에는 ‘해피 에버 애프터’의 견고한 벽을 넘어선 최초의 디즈니 프린세스가 등장했다.

신작 ‘빅 히어로’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이 영화는 지금껏 본 적도 없고 상상하기도 어려웠던 디즈니의 새로운 애니메이션이다. 원작은 동화가 아닌 마블 코믹스 작품. 수퍼 히어로 이야기가 드디어 디즈니 세계에 성큼 들어선 것이다. 디즈니가 이 영화를 ‘세기의 콜래버레이션’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는 돈 홀 감독의 아이디어였다. 3년 전 ‘곰돌이 푸’(2011·국내 미개봉) 작업을 마치고 다음 작품을 구상하던 그는 디즈니 픽사 CCO 존 라세터로부터 “열정을 따르라”는 조언을 얻었다. “어릴 때 무엇을 좋아했는지, 무엇에 몰두하고 있었는지부터 생각했다. 그렇게 떠오른 것이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마블 코믹스다. 두 가지를 조합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들뜨기 시작했다.” 돈 홀 감독의 말이다. ‘빅 히어로 6’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카드를 꺼내든 것도 돈 홀의 판단이다. 이는 그가 마블 코믹스 웹사이트를 뒤지다 우연히 발견한 작품이다.

‘빅 히어로’의 공간 배경은 가상 도시 샌프란시소쿄다. 단어 그대로 샌프란시스코와 도쿄의 풍경을 합쳐놓은 이색적 공간이다. 원작 코믹스가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만큼 일본어가 적힌 네온사인으로 뒤덮인 거리와 벚꽃, 마네키네코(인사하는 고양이) 같은 요소가 눈에 띈다. 샌프란시스코의 상징인 금문교도 동양적 느낌이 물씬하게 바뀌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왜색이 짙다고까지 표현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다. 북미 개봉 버전에서는 타다시였던 히로의 형 이름도 테디로 바꿔 혹시 모를 관객의 심리적 거부감을 미리 낮췄다.

중요한 것은 ‘빅 히어로’가 단순히 원작 그대로를 애니메이션으로 옮겨 온 작품이 아니라는 점이다. 코믹스의 세계관을 고스란히 스크린에 살리는 것은 실사영화가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 ‘빅 히어로’는 원작보다 그 결이 훨씬 부드럽다. 주인공 로봇 베이맥스의 캐릭터가 크게 달라지면서 생긴 변화다. 그러면서 전체적인 이야기의 방향도 달라졌다. 베이맥스의 목소리 연기를 맡은 스콧 애짓은 이 애니메이션을 이렇게 표현한다. “코미디에 모험을 섞은 감동적인 드라마다. 애니메이션 캐릭터에 이만큼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게 놀랍다. 모두가 알다시피, 이건 전통적으로 디즈니가 잘하는 방식이다.”

베이맥스, 사람을 치유하는 로봇

이야기의 중심에는 열네 살 히로(라이언 포터)가 있다. 열세 살 때 이미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을 정도로 머리가 좋은 소년이다.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로봇을 만드는 재주가 뛰어나지만, 아직 그 재능을 제대로 써 본 적은 없다. 불법 로봇 격투 대회에서 우승하는 정도의 소박한 재주만 부릴 뿐이다. 보다 못한 형 테디(다니엘 헤니)는 자신이 다니는 SFT 공과 대학의 로봇 공학 연구소에 히로를 데려간다. 연구소를 “범생이들이 모인 따분한 곳”이라고 오해했던 히로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각자 즐겁게 연구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신선한 자극을 받는다. 테디의 친구들이자 과학도인 고고(제이미 정)·프레드(T J 밀러)·와사비(데이몬 웨이언스 주니어)·허니 레몬(제네시스 로드리게스), 테디가 존경하는 로버트 교수(제임스 크롬웰)까지 모두 히로를 반갑게 맞이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히로는 테디가 발명한 치료용 로봇 베이맥스와 만난다. 그날, 히로에게는 SFT 공과대학에 입학하겠다는 꿈이 생긴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는 듯 보인다. 입학을 위해 공과대학 행사장에서 발명품을 제출해야 하는 히로는 자신이 로봇 격투에 사용했던 기술을 응용·개발한 마이크로봇을 선보인다. 아주 작은 칩처럼 생긴 이 로봇은 개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고, 어떤 모습으로든 변형할 수 있다. “인간의 상상력만이 유일한 한계”인 히로의 발명품은 모두의 이목을 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곧 거대한 슬픔이 히로를 덮친다. 행사장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사고로 히로는 형 테디를 잃는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빈자리를 채워주던 형의 죽음은 히로에게 큰 상실감을 안긴다.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히로는 베이맥스 덕분에 우연히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된다. 누군가 히로의 마이크로봇을 이용해 도시를 장악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화재로 전부 사라진 줄 알았던 마이크로봇은 마스크를 쓴 악당의 손에 들어가 있다. 악당의 존재가 형의 죽음과도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 히로는 이내 복수심에 불타오른다. 히로는 베이맥스를 전투용 로봇으로 업그레이드하는 한편, 고고·프레드·와사비·허니 레몬과 함께 팀을 이뤄 악당을 잡아들이려 한다.

이들은 자신의 과학 지식을 활용해 조금은 서툴러도 그럴싸한 영웅으로 거듭난다. ‘빅 히어로’는 그 과정에서 수퍼 히어로 장르의 공식과 클리셰를 의도적으로 피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블록버스터 여러 편을 한꺼번에 보는 듯 기시감이 드는 것은 그래서다. 왕국이나 동화 세계에 주로 머물렀던 기존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한번도 보여주지 않은 방대한 스케일임은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다. 여기에 이 영화만의 독보적 장점인 베이맥스가 가세한다. 베이맥스는 기존 디즈니 작품뿐 아니라 역대 애니메이션을 통틀어 그 어떤 캐릭터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매력을 지녔다. 사람을 이해하고 치유하는 로봇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베이맥스는 태생 자체가 누군가를 돕기 위해 만들어진 로봇이다. 이타심으로 가득한 이 로봇에게 이기심이나 질투, 미움과 오해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걸어 다니는 마시멜로 같은 이 로봇이 극 중 인물, 그중에서도 특히 히로를 넉넉하게 끌어안는 모습은 뭉클하다. 베이맥스가 전투용 로봇으로 거듭나는 것은 오로지 히로의 치유를 위해서다. “치료용 로봇이 왜 날아야 하는지 모르겠어” “왜 싸움을 배워야 하는지 모르겠어”라고 순진하게 묻던 베이맥스는 때때로 정곡을 찌르는 질문으로 히로의 마음을 흔든다. “마스크맨을 잡으면 네가 치유될까?” 점차 복수에 눈이 멀어가는 히로를 구원하는 질문 역시 베이맥스로부터 나온다. “이게 진정 테디가 원하는 것일까?” 나의 상실감을 이해하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주기 위해 곁에서 최선을 다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 내가 원하는 한 언제까지나 나와 함께 하는 친구가 있다는 것.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치유가 필요한 시대에 ‘빅 히어로’가 전하는 가슴 따뜻한 감동의 정체다.

재미있는 건, 본편 시작 전 상영하는 단편 애니메이션 ‘피스트’ 역시 비슷한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이라는 점이다. 이 애니메이션에는 함께 사는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알아서 행동하는 기특한 강아지 윈스턴이 등장한다. 윈스턴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실의에 빠진 주인을 위해 사랑의 메신저 역할을 자처한다. ‘피스트’는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 사이의 따뜻한 교감이라는 점에서 ‘빅 히어로’와 단단한 연결고리를 갖는 셈이다.

원작은 마블 코믹스의 '빅 히어로 6'

원작 `빅 히어로6`

‘빅 히어로’는 스티븐 T 시글과 던컨 로료가 쓴 마블 코믹스의 ‘빅 히어로 6’ 시리즈가 원작이다. 일본 도쿄에서 활약하는 수퍼 히어로의 이야기다.

빅 히어로 6가 처음 마블 세계에 등장한 건 1998년 ‘선파이어와 빅 히어로 6’를 통해서다. 일본의 정치·경제인 단체 기리(Giri)는 일본 정부의 요청으로 한 집단을 꾸린다. 이름은 빅 히로 6, 일본을 위해 일하는 히어로 팀이다. 초기 멤버는 엑스맨의 일본계 멤버 선파이어, 실버 사무라이, 허니 레몬, 고고 토마고, 오시마 등이다. 실버 사무라이는 13세 천재 소년 히로의 소문을 듣고 그를 팀에 영입하려 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런 히로가 빅 히어로 6에 합류하게 된 건 악당 에버레이스에게 엄마가 납치되면서다. 히로는 엄마를 구하기 위해 자신이 만든 로봇 베이맥스와 함께 빅 히어로 6에 합류한다.

원작에서 베이맥스는 의료용 로봇이 아닌, 히로가 처음부터 자신의 보디가드용으로 개발한 로봇이다. 베이맥스가 늘 히로 주변을 머물며 그를 지키는 데 열심인 이유다. 공격성도 뛰어나다. 위급한 상황이 되면 용으로 변신해 전투태세를 갖춘다. 모습은 애니메이션의 베이맥스보다 훨씬 험상궂게 생겼다. 외모와 성격은 공격적이어도 히로와는 각별한 사이다. 히로와 그의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기억이 베이맥스에 입력돼 있기 때문이다.

코믹스 ‘빅 히어로 6’ 시리즈가 이어지면서 멤버 구성은 조금씩 바뀌었다. 선파이어와 실버 사무라이가 빠지고 와사비노진저, 프레드질라가 새로 영입됐다. 애니메이션은 이 멤버가 주축이되 인종·초능력·성격 등 캐릭터 특징 대부분을 바꾸었다. 특히 삐딱한 성격의 여자 멤버 고고는 한국인이라는 설정이 추가됐다. ‘빅 히어로’의 리드 캐릭터 디자이너인 한국계 아티스트 김시윤의 솜씨다. 고고의 까만 머리칼과 찢어진 눈이 왠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건 그래서다.

글=이은선·김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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