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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백자는 나의 건축 교과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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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 상은 내가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 뒤에 오는 한국의 젊은 건축가를 위해 내는 길입니다."

건축가 이타미 준(68.한국이름 유동룡)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5일 오후 6시, 일본 도쿄 미나토 구 주일 프랑스 대사관. 한국인으로 일본에서 활동하는 그가 프랑스 정부가 수여하는 예술문화훈장 '슈발리에'를 받는 자리는 독특한 열기로 뜨거웠다. 2003년 7월부터 9월까지 프랑스 파리 기메박물관과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에서 열린 이타미 준의 회고전을 평가한 프랑스 문화성이 한국 건축가에게 처음 주는 훈장은 뜻이 깊었다. 오랜 세월 일본 건축계의 아웃사이더로 살아왔지만 그는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더 우뚝 솟았다.

"이타미 건축의 미학이 있다면 그건 지역성입니다. 집이 들어설 곳의 자연 풍토와 전통 추억을 아우른 건축이 제 독창성입니다. 그 땅에 살아왔고 살고 있고 살아갈 이의 삶과 융합한 집을 짓는 것이 제 꿈이고 철학입니다."

수상 연설을 하는 이타미 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예순 나이를 넘기고서야 "이제 건축이 뭔지 알겠다. 다시 시작이다"라고 말한 그의 초발심이 국제적인 주목을 받는다.

"나를 외부인이나 주변인으로 보던 일본 건축계가 충격을 받고 있어요. 건축전문지 '신건축'2006년 1월 호가 제 최근 작품으로 특집을 꾸미고 있습니다. 남이 날 뭐라 부르던 나는 한국인이란 얘기를 하고 싶어요."

그가 2001년에 제주도에 지은 '핀크스 골프 클럽 하우스와 게스트 하우스 포도호텔'은 제주도 오름의 이미지를 살렸다. 오래 생각해온 한국 도자기의 선도 들어앉았다. 지역성과 전통성을 어떻게 조화시킬까,자연과 공간을 새롭게 실험할 수는 없을까, 고민한다.

"조선 백자는 새 건축을 창조하기 위한 내 교과서입니다. 항아리가 품고 있는 색이나 선을 보고 있을 때 항상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백자 같은 집을 짓고 싶다고 하루 몇 번씩 외칩니다. 도자기를 보면 영감이 떠오르고, 보고 있으면 스케치가 절로 나옵니다. 내 건축세계의 독창성의 근본은 백자에 있습니다. 그건 생명,사랑, 따뜻함 같은 것을 뭉뚱그린 무엇이지요."

도쿄와 서울 두 곳에 이타미 준 건축연구소를 두고 있는 그는 요즘 서울 하루, 도쿄 하루, 제주 하루를 옮겨다니며 청년처럼 일한다. 손자처럼 챙기는 후배 건축가에게 "서양건축만 베끼지 말고 우리 고건축을 어떻게 현대로 끌어내 찔러 넣을까 고민하라"고 잔소리한다.

"박물관 네 채를 짓는 제주도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요즈음은 내 몸 속으로 제주의 바람이 불어요. 제주 사람의 상처를 보듬어준 그 둥글둥글한 오름의 선이 집으로 살아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궤적이 거기 있습니다."

도쿄=정재숙 기자

◆ 이타미 준=1937년 생. 무사시노 미술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일본과 한국에서 많은 집을 지었다. 건축가이면서 화가이자 서예가이고 한국 도자기와 민화 수집가이다. 대표작으로 도쿄의 M빌딩(1992), 부산국립해양박물관(1993), 경기도 게스트 하우스 올드 앤드 뉴(2000), 인사동 학고재(200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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