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잘못된「모자일체감」이 잇단 동반자살 불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반달곰의 죽음과 잇따른 어린이들의 죽음이 요며칠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보호받아야 할 생명들이 비명에 갔기 때문이라.
어렸을 때 읽은 동화가 생각난다. 겨울 잠에서 깬 어미 곰과 새끼 곰 두 마리가 먹이를 찾아 개울가에 내려 갔는데 마땅한 먹이가 없었다. 그때 어미 곰이 모래밭의 커다란 바위를 혼신의 힘을 다해 잡아 일으켰다 그 밑에는 게와 가재가 발발거리고 있었다. 희희낙락한 새끼 곰들은 덥석 덥석 게를 잡는 것이었다.
때마침 지나가던 포수가 어미 곰의 등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자신있게 방아쇠를 당겼다.
어미 곰은 움찔했으나 쓰러지지 않았다. 의아해진 포수는 또 한방을 쏘았다. 그래도 어미 곰은 꼼짝 않고 바위를 가슴하나로 끌어 안은채 우뚝 서 있었다.
살금살금 겉으로 가봤더니 어미 곰은 급소를 맞아 이미 숨져 있었지만 자식을 지키자는 본능에 바위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고 뛰노는 새끼 곰의 모습과 피를 흘리며 새끼를 지킨 어미 곰의 처절한 영상은 오래도록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짐승도 원초적인 모성보호본능이 있거늘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게야 말할 것도 없다.
어린이 동반자살을 통해서 새삼스럽게 한국의 모자관계를 생각해 본다. 삼종지도를 강요당하던 과거의 여성에게 자신의 삵이 있었을 까닭이 없다. 그래서 과거의 모성은 자식의 생에 자신의 생을 덧붙여 살 수밖에 없었으니 모자일체감은 오랜 세월동안 길들여진 하나의 생리현상이다.
자아상실의 무성은 현대가정 속에서도 방황하고 있으며 엉뚱하게 노출된다. 과보호나 과간섭은 어머니의 생도 독립하지 못하고 자녀의 생도 독립시켜 주지 못한데서 비롯된다.
심적인 탯줄을 끊지 못한 모정은 자녀의 입장에서 볼때도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의존성이 강하고 결단력이 부족하고 참을성이 결여된 어린이와 청소년 뒤에는 가려운데 손닿듯 헌신하는 어머니가 있는 경우가 많다.
나의 학생시절 스승인 K교수가 노모를 모시고 계셨는데 이따금『자식에게 부담이 되는 부모는 되지 말아야지』하시던 일이 생각난다. 그 부담이 결코 경제적인 부담이 아닌 것을 잘 알고 있다. 얼마전 학생들과 면담을 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니를 사랑하고 고마운 분으로 지적하면서도『나도 커가고 어머니도 늙어가시니 점점 부담스러워요』하는 학생이 상당수 있었다 아마 어머니들이 들으면 꽤 서운하겠지만 자신들의 위치를 직시해야 할 것이다.
모자일체감은 인간의 성장과정에 극히 초기적인 현상으로 누구에게나 있는 발달단계다 처음에 자기와 어머니를 동일시하던 어린이도 어머니는 다른 존재임을 깨닫고 자아개념이 성숙해 간다.
따라서 모자일체감은 정상적인 사람이면 어린 시절의 일시적인 현상으로 경험하고 차츰 탈피해야한다.
부모나 교사는 어린이의 독립적인 자아개념 형성을 도와 주어야한다. 일부 어머니가 집착하는 모자일체감은 미숙이라기 보다 병적 현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혼미하고 끈끈한 모자일체감은 어린이의 건강한 성장을 막고 어머니에게는 병리적인 행동을 충동질한다.
모든 동물에게 있어서 우주의 보호본능은 강한 것이지만 인간의 경우는 모성애로까지 중화시킨다. 호르몬의 분비나 본능적인 충동이 아닌 슬기로운 모성에는 인간만의 자랑이고 특권이다.
아뭏든 곰의 죽음과 곰의 동화와 병든 모성이 빚어 낸 끔찍한 비극 때문에 공연히 곰에게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며칠이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