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자이이타의 실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불교계는 부처님 오신 날을 즈음하여 「사랑의 보시」운동을 위한 여러 가지 행사를 가졌었다. 사회적인 자선행사로서 청소년 선도기금을 모금한다든가 양로원과 고아원을 방문하는 등 불우한 이웃을 돕는 자비행이 그것이다.
불교계는 앞으로 이러한 일을 더욱 확대해 실천할 것을 표방하고 있다. 이는 불교계가 새삼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하려는 움직임으로도 해석된다.
불교는 본시 자이이타의 사상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스스로 많이 배우고 닦아서 자기완성을 꾀하는 것이 자이요, 남을 이롭게 하고 남을 가르쳐서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공동의 구제가 이타다.
그중 자이 사상을 중심으로 한 것이 동남아 지역의 소승불교인데 반하여, 한국과 같은 대승불교에서는 이타사상을 이상으로 삼고 있다.
자기 혼자만 공덕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돌려서 자타가 다같이 공덕을 누리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불교의 가르침을 수행하는 길은 바로 이러한 보시와 사무양심(자비희사심)을 실천하는데 있다. 그런데 보시는 물질로 베푸는 재시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신심을 일깨우는 법시와 두려움을 없애주는 무외시는 물론, 남을 인자하게 대하고, 혹은 남의 심부름을 해주고 일손을 도와주는 봉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보시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자칫 보시에 인색하게 되는 이유는 거기서 얼마간의 댓가를 요구하는 이중성 때문이다. 혹은 헛된 욕망으로 말미암아 보시에 쓸데없는 사치와 낭비를 빚는 경우도 적지 않다.
참된 보시는 지극한 모성애와 같이 반대 급부를 요구하지도 않으려니와 또 드러냄이 있을 수도 없다. 하물며 가난한 이에게, 또는 괴로워하는 이에게 돈 한 푼, 물 한 모금 주는 것을 가지고 자기에게 돌아올 복의 미끼로 생각한다면 이야말로 옹졸한 욕심이 아닐 수 없다. 사사로운 욕망과 아집을 털어 버리고 철저하게 이타적일 때 비로소 대자비심으로 모든 의욕을 쏟아 정진할 수 있다.
이러한 실천적 보살행은 개개인이 깨달아 수행해야 할 신앙상의 지표일 뿐 아니라 그것은 오늘의 불교계가 과감하게 혁신해서 베풀어야 할 바람직한 지도 정신이기도 하다.
한국의 불교계는 지난 20여 년 동안 황폐화한 사찰들을 중흥하는데 전념해 왔으며, 그 결과 전국 각지에 현저하게 장엄 가남을 일으켜 놓았다. 그러나 한국의 사찰들은 현재 내실을 기하려는 열에 비하여 가장 큰 공덕인 보시에는 너무 인색한 감이 없지 않다.
불가의 보시가 한갓 불우이웃 돕기 정도에 그친다면 소극적인 사회활동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초기만 하더라도 불교는 국가가 다 못하는 일을 종교적인 차원에서 수행하는 구호기구를 가지고 대중에게 가까이 있었다. 금융면에서 서민층을 구조하던 「무진장」, 서민상대의 의료시설인 「비전방」과 「양병방」, 급한 재난을 당하여 임시 급식소 구실까지 해낸 「무차회」, 숙박시설을 대행한 「원」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후기에 사찰 재정의 고갈로 중단된 뒤 다시는 그런 기풍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들 옛 구호 방법이 오늘날 그대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대중에게 봉사하려는 기풍은 고금을 통하여 매우 소중한 것이다. 부처님 오신 날을 즈음하여 불교계도 혁신적인 보시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