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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사법부 과거사, 반성은 하되 권력 추종 안 돼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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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대법원이 사법부의 과거사 정리를 위해 과거 시국.공안 사건 자료 수집에 나섰다. 법원행정처가 최근 전국 법원에 긴급조치법.국가보안법.집시법에 관련됐거나 판결문에 '민주' 또는 '독재'라는 단어가 들어간 1972~89년 사이 사건의 판결문을 모아 제출하도록 지시했다.

사법부의 과거사 정리는 이용훈 대법원장이 취임하면서 예고됐다. 이 대법원장은 취임사에서 과거 사법부가 정치 권력으로부터 독립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인권 보장의 최후 보루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시인했다. 그러면서 "사법부가 행한 법의 선언에 오류가 없었는지, 외부의 영향으로 정의가 왜곡되지는 않았는지 돌이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대법원장의 지적대로 우리 사법부는 독재.권위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약자의 외침엔 귀를 막았다는 비판을 들어왔다. 현재 재심이 청구돼 있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경우만 해도 재판 과정에서 피고인들이 고문 수사 등을 주장했지만 75년 4월 대법원은 8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 사건은 사형 확정 뒤 20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해 대표적인 '사법 살인' 사례로 꼽혀 왔다. 그런 만큼 사법부가 과거의 잘못을 가려내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국민에게 사과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이 정권 들어 유행되고 있는 과거 청산의 구호에 맞춘 정치적 행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요즘 과거사 청산은 하나의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다. 권력이 이에 앞장서고 있으니 각 부처도 앞다퉈 위원회를 구성했다. 하지만 사법부의 과거사 정리 방식은 행정부처와 같을 수 없다. 법원의 판결은 법관이 그 누구의 간섭도 없이 오직 법과 양심에 따라 내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판결이 억압 정권에 의해 왜곡됐다면 그것에 대한 진솔한 반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미 사법부를 떠난 인사들에 대한 부관참시나 사법부 내의 인적 청산 등으로 이용돼서는 안 된다. 또 제삼자가 판결에 대해 왈가왈부할 사안도 아니다. 사법부의 과거사 정리는 사법부 손에 맡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