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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주사 (酒邪)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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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시인 수주(樹州) 변영로(1897~1961)가 젊었을 때 얘기다. 경성 계명구락부에서 조선어사전 편찬 작업을 하던 그에게 어느 날 인촌(仁村) 김성수가 찾아왔다. 술 생각이 난 것이다. 두 사람은 심농(心農) 김찬영과 함께 주점으로 갔다. 맥주병을 한참 비우던 중 수주가 갑자기 인촌에게 술을 뿌렸다. 술을 좋아하는 수주는 취한 상태였다. 인촌은 그걸 알면서도 화가 나서 소리쳤다. "이 자식아, 친구를 때리려면 때리고, 욕하려면 욕을 하지 술을 왜 끼얹느냐."

수주는 "그러면 어떠냐"며 또 한 잔을 뿌렸다. 인촌은 폭발했다. 맥주병을 집어 들더니 수주의 이마를 사정없이 가격했다. 그러자 수주는 신선로를 던졌다. 쇳덩어리는 다행히 빗나갔다. 이제 친구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질 판이었다. 그 순간 인촌의 행동이 달라졌다. 수주의 이마에서 피가 흐르는 걸 보고선 그를 껴안고 흐느끼며 말했다. "내가 너에게 피를 흘리게 하다니, 어찌 이런 일이 있느냐."

그 말에 수주는 정신을 차렸다. 인촌에게 잘못했다고 했다. 벗들은 그날 통음(痛飮)을 했다. 수주는 머리에 붕대를 감고 마셨다. 난장판이 될 뻔했던 술자리는 인촌이 인내심을 발휘함에 따라 우정을 돈독히 하는 자리가 됐다.

국정감사 기간 중 국회 법사위 소속 의원 일부와 검사 몇 명이 술판을 벌이다 일행 중 한둘이 술집 주인에게 폭언과 욕설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 의원과 피감기관 관계자가 부적절한 회동을 한 것도 모자라 술에 취해 추태를 부린 것이다. 폭언했다고 시인한 검사는 그 자리에 간 걸 후회할 것이다. "말조심을 했어야 하는데"라며 인내심이 부족했던 걸 한탄할지도 모른다. 한때 모든 죄를 뒤집어썼던 모 의원은 진상이 좀 밝혀져 한숨을 돌릴 것이다. 그러나 그도 상스러운 말을 한 이상 억울함을 주장할 이유는 없다.

주사(酒邪)에도 품격이 있다. 검사든, 의원이든 인촌처럼 행동했다면 탈이 나지 않았을 것 아닌가. 술이 과해 잠시 주사를 부리더라도 그걸 잘 다스릴 인격이 있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그러나 인격 수양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러니 과음을 삼가는 편이 낫다. "술이 들어가면 지혜가 나가버린다"고 17세기 영국 시인 조지 허버트는 말했다.

이상일 국제뉴스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