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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당시 최대혈전지 남원성전투상황 한눈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임진왜란중 최대 혈전의 하나였던 남원성 전투의 일본측 작전도가 나왔다. 그린이는 당시 이 전투에 참전했던 왜군 「가와까미」(천상구국). 일본 녹아도도서관에 묻혀있던 것을 최근 이가정문씨(75·일본 조일학생신문사 상담역·문학박사)가 찾아내 우리나라 우계이씨 중앙화수회(경북영주시)의 이영욱씨에게 보낸 것을 국사편찬위원회 최근영씨가 입수한것.
이가정문씨는 남원성 전투당시 전라도 병마절도사로서 왜적을 맞아 싸우다 막료들과 함께 순사한 이복남장군의 12대손. 당시 왜군이 볼모로 데려간 이장군의 아들 이성현은 바로 이가정문씨 가문의 시조며, 바로 이같은 사실은 이가정문씨가 자신의 「뿌리」를 찾아헤맨 60년 각고의 결실이기도하다.
이번에 나온 각전도의 크기는 68×90cm로서 성의 형상과 규모, 성내의 건물과 통로, 성문과 성벽, 성호등은 물론 왜군의 포진과 배치도가 상세히 기재돼 있다. 어느 장수가 몇명의 병력을 데리고 어느지점에 위치하는지 모두 기록돼 있다.
또 성안에 있는 십자형통로의 중앙교차로에는 「대장양원」이란 이름이 보인다.
남원성전투는 정유재난이 일어나던 1597년 8월13∼16일까지의 나홀간 벌어진 전투다. 남원성안에는 명에서 파견된 부총병 양원이 이끄는 요동병 3천에 아군1천등 약 4천명.
이때 우희다수가·소서항장등이 이끄는 왜군 5만6천여 병력의 파상적인 공격을 받게됐다.
나홀간의 피비린내나는 공방전 끝에 16일 양원은 3천병력을 망실한채 도주했으며, 아군측의 병사 이복남·접반사 정기원·방어사 오응정·조방장 김경로·별장 신호·부사 임현·판관 이덕회·현감 이원춘등은 병사들과함께 일보도 후퇴하지않고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던것.명측의 중군 이신방·천총 장표등도 함께 전사했으며 성은 실함의 비운을 맞았다. 명조정은 양원의 죄를 다스려 참형에 처하고 그참두를 남대문밖에 보내니 조정에선 그의평양전투의 공을 생각해 제사를 지내주고 평양서문밖 무열사에 그의 화상을 모시게 했다.
현재 남원시에는 국난을 당해 순사한 이복남 등을 모시는 충렬사와 1만여 병사와 주민의 시체를 합장한 만인의총이 가꾸어져 있다.
이현종 국사편찬위원장은『일본군이 남긴 작전도는 매우 희귀한 자료』라면서 이를 계기로 남원성전투의 역사적 의미를 재음미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남원성은 평지의 성으로 원래 당나라장수 유인궤가 쌓았다는 설이 있으나 『삼국사기』 엔 신문왕11년 (691년)에 축성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후 돌보지않다가 임진정유 양난을 맞으면서 급히 수축했다. 숙종18년(1692년)에 다시 복구했으나 그후 전난과 시가정리로 뜯기고 헐리어 현재 서북쪽 가장자리에 약간의 성벽흔적만이 남아있을뿐이다. 지난해11월 사적제298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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