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뿌리없는 성장」이 범죄의 길로|「빗나간 인생 조세형」…「대도」가 되기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도 조세형은 어떻게 태어나고 자라나 범죄꾼이 되었을까. 단순절도범이 이렇게 많은 화제를 뿌리며 국민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적은 일찌기 없었다. 조의 성장과정을 들추어 그의 실상과 허상을 똑바로 알아보는 것도 범죄예방·청소년선도에 도움이 될 것이다.

<출생>
조의 고향은 충남공주군계룡면계룡산어귀. 태어난 곳은 전북전주에 있던 외가에서였다.
6·25동란 2년전인 1948년생이니 올해 35살이다 (38살로 알려진 것은 조가 74년께 호적을 만들면서 전과·가족관계등을 숨기기 위해 나이를 고쳤기 때문이다. 조는 이때부터 고향은 이북이며 단신 월남한 고아로 행세했다.
조의 아버지는 양화점을 경영하고 있었으나 6·25가 나자 괴뢰군에 붙잡혀 총살을 당하고만다.
가족은 형과 누나가 1명씩이고 조가 3남매중 막내. 아버지는 가족과 떨어져 장사를 하며 한달에 한두번씩 집을 찾곤했지만 소실을 얻어 두집살림을 하느라 가정불화가 잦았다.

<성장>
어머니는 남편을 여의자 2살된 조를 데리고 전주의 친정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손위 남매는 모두 데리고 있을수 없어 전주에 있는 고아원에 맡긴채였다. 3년쯤 지나 어머니는 조를 친정에 놔둔채 개가했다.
세형이 7살 되던해 보다못한 고모가 맡겠다고 나섰다. 고모는 6·25때 남편과 사별하고 외가에서 4km쯤 떨어진곳에 살면서 전매청에 다니고있었다.
고무밑에서도 말썽은 끊이질않았다. 주로 동네꼬마들의 물건이나 먹는것을 빼앗아 손가락질을 받았다. 고모가 견딜수없는 것은 『부모없이 자란 ××새끼』란 욕설이었다.
할수없이 세형이 9살 나던해 서울에 있는 백부집으로 넘겨진다. 백부는 한약건재상을 하고 있었고 세형의 형도 이곳에서 일을 하고있어 형제와 함께있는 좋은 기회였다.

<가출>
그러나 상경 1주일도 채못돼 세형은 가출을 시작했다. 전차표를 사려고 줄서있는 여자들에게 손을 내밀어 용돈을 뜯어쓰는 일종의 앵벌이로 활동무대는 주로 을지로통이었다. 형이 몇번이나 찾아내 흠씬 패주고 데려오기 일쑤였지만 며칠을 못넘기고 가출해 속수무책이었다.
이미 검은손에 물이들었던지 10살이 넘어서면서부터는 한쪽손에 자전거체인을 감고 다니며 자하문밖 자두밭을 작살내는등 난폭함마저 나타냈다.
성격이 차분하면서도 고집이있어 한번 세형이 골을 내면 누구도 당할 사람이 없었다.
가출한후 2∼3달에 한번꼴로 형에게 잡혀오긴 했지만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는 결코 말하지 않았다.
11살 되던해 세형은 마지막으로 집을 떠났고 그의 형은 다음해 군에 입대하는 바람에 완전히 소식이 끊겨버렸다. 간간이 들리는 소식으로는 불광동쪽의 소년원에 있기도하고 떠들이 생활을 한다는 것이 고작이었다.
제대후 형은 서울사직공원에서 또래들과 어울려있는 세형을 찾아냈다. 15살이었으나 체격이 큰편이어서 소년티는 벗어나 있었다.
형은 세형을 무악재부근의 금화산으로 끌고가 삭발해 버린뒤 텐트를 치고 함께 자취를시작했다. 첫날밤을 눈물로 지새우며 설득했으나 세형은 1주일도 안돼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이미 그의 가출벽은 아무도 말릴수가 없을만큼 고질로 되어 있었다.

<교도소와의 인연>
6년쯤 지난뒤 형은 일간지에 세형을 찾는 광고를 내기까지 했으나 소식이 없었다.
죽는것을 보았다는 사람도 여럿이어서 형은 사망신고를 낸뒤 호적에서 삭제해버렸다. 한참 뒤 신원을 숨긴 누군가가 세형이 영등포교도소에 있다고 알려왔다.
출소하는날 광주까지 면회간형을 따돌리고 「흰색스웨터를 입은 애인」과 함께 세형은 교도소 뒤편 철망을 넘어 달아나버렸다. 나중에 알고보니 세형에게는 후암동에 사는 수양아버지가 있어 사위를 삼기위해 한집에 데리고 있었다. 몇달후 어떻게 찾았는지 세형은 형집에 들렀으나 『무역을 하다 밀수에 손댔었다』고 얼버무리고 도둑질을 했다는것은 끝까지 숨겼다.

<기업형 절도>
전과7범이 될때까지 무명의 좀도둑에 불과했던 세형은 75년「기업형 절도」의 창시자로서 매스컴에 데뷔,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이사건을 계기로 하나밖에 없는 형과도 의절하고 고아로 행세했으니 조에게도 전환점이 된사건이었다. 망원경·전기절단기·드라이버등 각종 장비를 갖추고 상습적으로 도둑질을 했다고 붙여진 이름이었다.
당시 혐의내용은 『72년4월 임원옥씨 (서울신문로2가1의109) 집에 들어가 백금 다이어반지(3캐럿)등 2백60점의 귀금속(싯가 7천2백45만원)을 훔친것을 비롯, 3년간 고급주택가에서 1억여원어치를 훔쳤다』는 것이었다.
당시 특수절도죄의 법정최고형이 징역10년이었으나 상습·경합으로 가중되어 징역25년의 법정최고형이 구형되자 다시 신문의 머리기사로 등장했다. 서울역촌동19의50 그의 집에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의 집을 지키기위해 5만원짜리 사나운 셰퍼드까지 사들여 길러왔다.
당시 관여했던 서울지검 박희태대검검사(현법무부 출입국관리국장)는『피고인은 교도소를 드나들면서 참회는커녕 오히려 그 악성이 심화되어 수감기간을 새로운 범죄의 준비기간으로 악용하는등 인간성을 상실한 전형적인 범죄인이 되어 이제 단기의 자유형으로 교화할 수 없게 됐다』고 논고하고 『상습적·반복성·몰인간성등 간계를 모조리 갖춘 피고인의 최대도전에는 피고의 응징으로 최장기간을 사회와 격리하여야한다』고 밝혔다.
이 사건으로 세형은 l심에서 징역12년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징역7년으로 깎여 82년3월까지 안양교도소에서 복역했다.

<수감생활>
그는 보스기질도 있어 재소자들 사이에서는 평판이 괜찮고 인기도 있었던것같다.
같은 방에 입감된 감방동기생들은 특히 그의 거것말섞인 과장된 경험담을 듣는것을 재미있어 했다. 그는 말솜씨도 좋아 좌중을 압도했고 어떤 동기생들은 팔 내밀어 팔뚝에 조의 사인을 받아가기도 했다.
그의 자랑은 언제나 『있는집을 털었다』는 것으로 마치 의적인양 으스댔다고한다. 자기가 훔친 물건에다 몇갑절을 더해 말하고는 『그들이 나중에 봐달라고해서 피해액을 줄여주었다』고 큰소리치기도 했다.
듣는 사람이 황홀할 정도로 유명인사의 이름을 들먹이며 『어느집에는 금불상이 있더라』 『어느집에는 TC(여행자수표)와 어음이 몇억원어치가 있었지만 현금으로 바꿀수 없을것 같아 안가져왔다』 『누구는 신고조차 않고있다. 나중에 내가 붙잡힌뒤 경찰에서 부르자, 가정부를 보내 도둑맞은 적이 없다고 오히려 잡아떼더라』고도 말했다.
7년동안의 기간중 그가 배운것도 많았다. 한글이라고는 이름정도밖에 못쓰던 문맹자였으나 최근엔 영어도 중얼거릴만큼 발전했다. 전에는 보석을 볼줄몰라 장물아비에게 이용만 당하고 꼬리가 잡혔지만 같은 감방에 보석상이 함께 수감돤것을 계기로 보석감정은 물론 보석가공기술까지 익혔다.
조는 스스로 『절도대학원 (교도소)에서 절도과를 전공한 도학의 대가』라고 불렀으니 보석공부는 여기에다 날개를 달아놓은 격이었다. 조는 82년3월 만기출소한후 4월부터 또다시 도둑질을 시작, 10월에 잡히게됐고 이번에 탈주사건을 벌이게된 것이다.

<여자관계>
조는 3번 결혼한 것으로 알려져있으나 혼인신고는 한번도 한적이 없다. 결혼식을 했어도 형이나 친척에게 알린적은 물론 없었다.
첫부인은 서울 후암동 수양아버지의 딸이었다는게 정설. 조의뒤를 돌봐주며 사위를 삼는다고 자기 딸과 동거시켰다는 말도 있다..
둘째는 전처로 알려진 이모씨 (49). 10년이상 연상의 여인이지만 75년 잡힐때까지 장물아비노릇과 함께 동거생활을 계속했다. 서울 역촌동집에서 셰퍼드를 기를때가 바로 이씨와의 기간. 조는 당시 한달에 한번꼴은 이씨와 부산으로 여행가면서 50여만원씩 뿌린 것으로 화제가 됐었다.
세번째가 지금 홍콩에 가있는 나모씨. 나씨와는 지난해10윌31일 정식 결혼했으나 신혼26일만에 검거됐고 탈주동기가 바로 나씨를 못잊어서였던 것으로 진술하고 있다.
조가 아직까지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기는 없다.
지난해 검거될때 나씨가 임신중이었으나 도둑이란 정체를 알면서 충격을 받아 유산했다고한다. 친척들은 아예 『조의 친척이 된다』는 사실조차 부인하며 숨겨온지 오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