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자유당과 내각(3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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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족청거세는 촉청계를 전향자의 집단으로 물수있는 꼬투리를 잡으면서 시작되었다. 그 최초의 희생자인 족청충북부단장 신형식씨의 증언. 『이대통령은 이범석씨가 부통령이 되는것은 막았지만 우리는 선거후의 여러조치로 미루어 이범석을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선거를 전후해 족청계의 백두진·진헌식·신중목씨등을 장관으로 기용하는등 일련의 조치를 우리는 그런 신호로 본 것이다.

<"야당까지 반족청">
마침 나는 자유당 훈련원의 강사를 맡게 되었다. 정치훈련원은 김태선 서울시장, 윤자경시경국장, 윤재욱서울시당위원장의 도움으로 지금은 헐린 광화문뒤편의 태화관에 설치, 실시됐다. 내가 강의한 조직론은 이박사 이후는 이범석이니 그에 맞춰 조직을 확대하라는 것이 근간이다. 나는 그이유로 독립운동정통성의 계승과 청렴, 그리고 국민의 지지, 세가지를 특히 강조했다.
독립운동 계승이란 친일지주계층이 중심을 이룬 야당주류에 대한 공세의 뜻도 있었다. 한마디로 족청중심의 자유당 정예당원 양성이 목표였다. 그럴때 당내의 비족청계는 물론 야당까지 반족청운동에 나서 있었다.
53년5윌10일 대전서 열린 자유당 전당대회에서 나는 「반당불순분자징계위원회」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위원은 60명정도였는데 공천신청자에 대한 평점과 이범석의 부통령선거방해자를 색출해 징계하는것이 주임무였다. 이렇게되자 이활류화청 박용만씨등 반족청계는 기자회견을 통해 족청비난성명을 냈다. 나는 경무대로가 이정석경무대경찰서장 입회하에 보고를 했다. 성명을 듣고난 이박사는 <한집안에서 뜻이 안맞으면 살림이 되겠나. 그런 사람은 따로 살아야 돼>라는 것이었다.
나는 비족청계는 제거해도 좋다는 승낙으로 알고 1차로 비난성명을 낸 이·유·박 세사람과 손창섭진승극등 다섯사람을 징계했다. 징계결과를 이박사에게 보고했더니 <잘했어. 앞으로는 당원훈련을 잘하도록해>라는 것이었다. 나오다 장기봉비서(전신아일보사장)에게 들렀더니 이박사께서 나의 조직교본을 보고 칭찬을 하더라는 말도 해주었다.
이래저래 우리는 사기가 올랐고 이범석후계를 확신했다. 물론 반족청운동도 대단했다. 자유당내 비족청계와 야당뿐아니라 백성욱 윤치영 이기붕 박마리아등 이박사 측근들도 가세해 있었다. 「이범석은 반신이다」 「그의 밑에는 좌익전향자투성이다」 「김일성과도 타협하려한다」는 모함까지 했지만 이박사의 신임을 확인했다는 자신감에서 우리는 자신만만했다. 그런데 실로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
북진통일투쟁위원회 부위원장도 겸하고 있던 나는 청주에서 열린 6·25 2주년행사에서 연설을 했다. 연설을 마치고 내려오니 이종대시장이 <김일성장군을 따르자고 한 것 같은데 기억이 나느냐>고 했다. 나는 그런 기억이 없고 이범석장군을 따르자고 한 것 밖에 없는데 그럴리 없다고 했더니 이시장은 <그래도 취소하는것이 좋겠다>고 해 다시 연단에 올라가 <실언이 있었다면 양해해달라>고 했다.

<"전향자 투성이다">
그런데 며칠후 검찰에서 구속영장이 날아왔는데 알아봤더니 자유당 사람은 김일성 찬양을 해도 되느냐는 말들이 있어 신변보호를 하려고 구속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실 대중앞에서 중대실언을 했다면 벌을 달게 받겠지만 족청타도음모에 걸린듯해 염려스러웠다. 변호를 맡은 신태악씨에게 <국방경비법과 국가보안법을 적용했다는데 어찌된 셈이냐>고 했더니 <며칠전 이박사가 서상권법무장관에게 말은 잘못 나올수도 있는것이니 풀어주라고 했는데서장관이 신변보호의 측면에서 우선 구속해 놓은것이라고 대답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염려하지말라>고 했다. 그랬는데 얼마뒤 면회도 금지되었고 2심에서 사형구형에 10년언도를 받았다. 4·19후에야 풀려나 나의 재판에 관여했던 정희택검사를 대검검사실로 찾아가 신변호사의 말을 확인했다.
정검사는 <3년쯤 구형하면 정치적사건이니 풀려나려니 하고 논고문을 썼는데 서장관이 사형구형을 지시해 논고문을 바꾸느라 고심했다>고 했다. 당시 서장관은 족청계인 신태악 변호사로부터 법무장관 자리를 도전받고 있었고 백두종재무와도 총리경쟁을 하다 밀린 입장이어서 족청을 싫어했다.

<박마리아도 한몫>
나를 족청타도의 구실로 쓴 것이 아닌가 느껴진다. 뒤에 들으니 나와 대립해 있던 충북출신의 이충×의원이 이기붕부인 박마리아에게 <신은 빨갱이>라고 얘기했고 그말이 「프란체스카」여사한테도 전달되었다는 얘기들도 나돌았다. 이사건에서 풀려난 뒤에도 나는 이범석씨를 가깝게 도왔는데 생각해보면 이범석씨는 이박사의 뜻에 가장 충실했던 사람이고 우리는 그를 따랐다. 그것이 오늘까지 족청의 뿌리라해서 계속되는 저력이 아닌가싶다. 매년 10월9일이면 창경원에서 족청출신모임을 갖고 옛날의 꿈들을 되살려보곤 한다.
족청의 전위 신형식의 구속은 족청을 궁지로 몰아넣는 신호가 되었다. 그 사건으로부터 두달이 지난 8윌31일 양우정의원의 오른팔이던 정국은이 국제공산당이라는 어마어마한 죄목의 혐의로 구속되었다.
양우정은 족청계로선 경무대 신임이 가장 두터웠던 실력자로 족청에 대한 공격을 막아내는 방패막이였다. 그의 오른팔 정국은은 양의원이 경영하던 연합신문편집국장으로 족청의 이론가이자 참모고 선적책이었다.
사건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다시 그로부터 48일이 지난 10윌28일엔 양우정의윈 역시 간첩혐의로 구속되었다. 그사이 내각에도 족청거세의 바람이 불어 진헌직내무·신중목농림이 파면되고 이대형상공장관도 해임되었다.
이범석은 이기간 의유중이었다. 그는 자유당의 대전대회가 끝난 직후인 5월하순 참전국 순방의 사명을 띄고 외유의 길을 떠났었다. 그는 12윌9일 귀국했다. 그가 김포공항에 내렸을 때 둘은 제1보는 자유당의 제명조치였다.
이기붕 이갑성 배은희등이 장악한 자유당은 이범석이 귀국하던 그날 이범석 안호상 양우정 이대형 원상남 윤재욱 신태악등 족청계 핵심 8명을 제명해 버린것이다.
이런 일련의 족청제거가 대통령의 지시였다는 것이 이박사가 족청을 경계했다는 풍설의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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