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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36년<4>대한제국의 최후④|발굴자료와 새증언으로 밝히는 일제통치의 뒷무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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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국을 병합한 일본은 그 기념비를「우찌다」의 집에 세웠다. 일진회를 조종하고 일본정계의 병합운동을 채찍질한 야인「우찌다」의 역할이 얼마나 컸던가를 말해주는 증거다. 「우찌다」가 「이또」통감의 개인보좌역으로 서울에 왔을때 서울주재「하야시」(林權助)공사마저「무뢰한의 집단」일진회는 해산함이 옳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우찌다」는 더 영리하고 교활했다.
l906년 9월26일자로「이또」에게 제출된「우찌다」의 비밀보고서는 일진회를 해산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일진회는 백만회원을 가진 단하나의 친일단체다. 송병준의 석방을 주선하고 재정후원을 해 재기시키면 멀지않아 이용가치 있는 단체가 된다는 것이 보고서의 요지다. 「이또」설득에 성공한「우찌다」는 곧바로 이용구를 불렀다.
▲일진회의 노선이 나의 뜻과 같다면 송병준을 석방토록 주선하겠다.
▲일진회 회원은 송군과 나를 신뢰하고 명령대로 복종한다… 귀하의 노선이란 무엇인가.
▲천하 형세가 일한합방으로 기울면 반대하지 않겠다고 보충하는 일이다.
▲평소의 나의 뜻도「다루이」의 대동합방론이었다 .
송병준은 그 자리에서「우찌다」를 일진회 고문으로 추대했다.
10월24일 송병준은 풀려났다. 감사의 인사를 위해 「우찌다」를 찾아간 송병준은 한술 더 떴다. 「고종황제는 합방의 방해자다. 퇴위하도록 투쟁하겠다」는 결의표시였다. 「우찌다」는 이듬해 2월 송병준을 도오꾜에 데리고가「야마가따」「가쓰라」「데라우찌」등 군부파와 연결시켰고 재정문제도 해결해주었다. 「우찌다」의 다음 구상은 송병준을 내각에 참여시키는 일이었다.
「우찌다」는「이또」에게 박제순-일진회연립내각을 건의했다. 그런중에 박제순 내각은 국책보상운동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사직했다.「우찌다」는 일진회단독내각을 건의했다. 그랬지만 「이또」의 책략은 달랐다. 일진회만의 내각보다는 일진회와 관료세력을 한데 묶어상호 견제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또」는 을사조약 체결때 공을 세운 이완용을 총리로 하는 이완용 내각을 성립시키면서 일진회에서 송병준만을 입각 (농상공대신) 하게 했다.

<송병준 입각시켜>
농상공대신 송병준은「우찌다」의 밀령에 따라 고종폐위 운동을 벌이려 했으나 「이또」의 승낙을 얻지 못했다. 그러던 송에게 기회가 왔다. 1907년6월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송병준에게 다가온 기회-「우찌다」는 뒷날 그의 「일한합방시말기」에서 그때의 송병준을 이렇게 썼다.
『그는 마치 눈먼 거북이 물에 뜬 나무토막을 얻은것 같았다. 그는 10년 숙원이던 고종의 폐위를 관철할때가 왔다고 좋아했다 그는 일진회 회원중 용맹이 뛰어난 고청룡을 시위대장으로 천거해 궁궐을 장악했으며 형세가 불리하면 병력으로라도 일을 치러낼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실제 송병준이 어전에서 고종에게 물러날 것을 강요하고 있을 때 궁성 밖에선 횃불을 높이 든 수백명의 일진회회원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하고 물러난뒤 대한제국의 행정권마저 통감에게 위임하는 정미7조약(한일신협약)이 체결되었다. 이같은 또 하나의 음모가 성사된 뒤 「이또」는 이용구·송병준을 불러 노고를 치하하면서 일진회에 50만엔의 보조금을 내려보냈다.
그렇지만 정작「우찌다」는 이 정도에 만족하지 않았다. 한일신협약은 을사조약을 약간 확대한 빈수레일 뿐이다. 「이또」는 절호의 기회를 활용하지 못했다는 것이「우찌다」의 불만이었다.
당시 한국을 병합하라는 기본목표에선「이또」도「우찌다」와 뜻이 같았다. 다만「이또」는 궁중의 음모와 백성의 소요로 문제를 일으켜 병합을 한국인의 뜻으로 이끌어낸다는 점진주의였다. 반면「우찌다」는 점진주의는 분위기를 무르익게 하는데만 필요할뿐 준비가 끝난 단계에선 병합을 정격적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고종 물러나라">
1907년말부터 「우찌다」는「이또」의 권위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그는「이또」의 점진주의는 돈과 시간의 낭비일뿐 한국병합을 멀개하고 있다는 점을 정책결정 자에게 설득하라고 도오꾜의 흑룡회에 지령했다.
「우찌다」는 이듬해 연초「이또」통감의 개인보좌역 자리를 물러나 자유스런 위치로 돌아왔다. 그는「이또」의 라이벌인「야마가따」「가쓰라」「데라우찌」등 군부실력자들에게 편지를 보내「이또」도 통감을 교체해야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야마가따」등은 한국의 전격적 병합을 찬성하면서도 정적「이또」가 통감 자리를 내놓고 도오꼬에 돌아오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들의 입장은 차라리「이또」가 영영 한국에 머물러 있기를 원했다.
「이또」역시 이런 움직임과 정적들의 속셈을 모를리 없었다. 그해 4월「이또」는 도오꾜로 갔고「가쓰라」수상과의 밀담에서 병합방침을 확인했다 (연재1회). 7월6일 일본내각은 한국병합을 결의했다. 「이또」도 통감자리를 부통감이던 직계「소네·아라스께」(自禳荒助) 에게 넘기고 일본으로 돌아가 추밀원의장에 복귀했다. 이제 대한제국의 종말은 시간문제였다.
「우찌다」는 제2단계로 이행했다. 그는 같은 대륙남인이면서 군부와 밀착해있는「쓰기야마·시게마루」 (杉山茂丸)를 일진회 고문으로 초빙했다.
는 한국안의 병합지지파 확대를 위해 당시 서울의 3대 정치단체라 할 일진회 대한협회 서북학회의 연합을 지령했다.
이용구는 국난 타개를 위해 단결하자는 명분을 내걸고 연합교섭에 나셨다.
「우찌다」의 3파연합추진은 이완용 내각을 무너뜨리고 일진회를 중심으로 하는 3당연립내각을 구성, 내각으로 하여금 합방청원을 내도록 할 책략에서였다(흑룡회의 합방비사). 「우찌다」는 「소네」통감에게 이 구상을 제시했으나 거부당했다. 자칫하면 권력투쟁을 몰고와 정국을 불안케 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소네」의 판단이었다.
이용구의 통합교섭도 뜻대로 진척되지 않았다. 서북학회는 3파연합을 반대해 이탈했다. 대한협회만은 일부에선 반대가 있었으나 온건파와 매수된 일부가 남아 연합에 호응했다. 1909년9윌23일 경성호텔에서 양당연합간담회가 열렸다. 일진회에서 이용구 홍긍섭등 29명, 대한협회에서 김가진 오세창 윤효정등 21명이 참석했다.
또 하나의 일진회가 된 대한협회는 윤치호가 조직했던 대한자강회의 후신이다. 헤이그밀사사건후 대한 자강회가 해산되자 일본중의원 의원으로 서울에 와있던「오오가끼」(大垣大夫)가「이또」에게 부탁해 대한협회란 이름으로 부활시킨 것이다. 대한협회 발족에는 오랫동안 숨겨졌던 사연이 있다.

<종말은 시간문제>
1907년10월 일본의 가인황태자 (후에 大正天皇)의 서울방문때 수행원의 일원이던 군부 실력자「가쓰라」는 황태자의 귀국후 따로 남아 1주일쯤 서울에 머물렀다. 그가 서울에 머무른 목적은「이또」휘하의 일진회와 맞먹는 군부 휘하의 또 다른 친일단체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그전까지 군부 조종을 받던 일진회가 그 무렵엔「이또」쪽으로 기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쓰라」는 「오오가끼」와 의논, 해산된 자강회를 대한협회로 만들고 김가진 윤효정 권동진 오세창등을 수뇌부로 하고「오오가끼」를 고문으로 앉혔다. 「가쓰라」는 백성의 여론에는 두가지가 있을수 있다는 것을 대한협회발족의 명분으로 했다. 일본정계 실력자의 재정후원에다 일본인 고문의 지도를 받는 대한협회가 일본의 통감정치를 돕고 병합의 길잡이가 되는 것은 처음부터 정해진 길이었다.
후에 대한협회는 합방성명을 낸 일진회의 친일 행위를 규탄하고 이완용 내각의 매국행위를 규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적 라이벌인 일진회의 견제였을 뿐 친일의 면에선 일진회와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같은 궤도 위에 있었다는 것이 뒷날 여러 문서들에 의해 밝혀졌다.

<대한협, 일진회규탄>
일진회와 대한협회가 정견협정위원회릍 설치해 합방준비공작을 진행하고 있던 1909년10월26일 전환의 고비가 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만주를 방문키 위해 하르빈에 도착한「이또」가 한국인 안중근의 총격을 받고 사망한 것이다.
일본정계 최고실력자며 을사조약강압의 장본인 「이또」의 총격은 한국의 반일운동을 세계에 알린 쾌거였다. 그랬지만 또다른 면에선 한국의 입장을 궁지로 몰아넣는 결정적 타격이 되고 말았다.
일본의 조야는 들끓었다. 급진론자들은 「이또」의 죽음을 복수하라고 했고, 당장 한국을 병합하라고 요구했다. 일본정계 유력자들도 이른바 조선문제동지회 라는 모임을 결성해 일 진회를 돕기로 하고 일본정부에 대해서는 한국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조치, 즉 병합을 조속히 실현하라고 촉구했다.
「이또」의 국장에 참석키 위해 도오꾜로 돌아온「우찌다」는 기다리던 결정적 시기가 왔다고 단정, 병합운동에 흑룡회를 동원했다. 그는 서울에 머무르고있던 일진회고문「다께다 한시」(武田範之)를 도오꾜로 불러 일진회이름으로 발표할 합방청원서를 작성하라고 일렀다.
문제의 인물「다께다」는 일본 불교의 승려. 일찌기 동학난때 청일전쟁 방화의 행동대인 왕우협의 일원으로 「우찌다」와 함께 한국각지를 돌았고 을미사변때 민비시해의 주역이기도 했다. 그는「우찌다」 와는 「평생동지」관계를 맺었고 한문에 뛰어났다.
도오꾜에 모인 일진회의 고문들「우찌다」「다께다」「쓰기야마」 세사람은 합방건의서 초안을 작성한뒤 이를 들고 군부강경파인 「야마가따」 와「가쓰라」를 찾았다.
일진회가 발표할 이 건의서는 일본이 합법적으로 대한제국을 병합할 훌륭한 명분이 될 것이라는「우찌다」의 말에 그들도 동의했다. 세사람은 「데라우찌」에게도 찾아갔다. 「데라우찌」는 건의서를 한국황제 총리대신, 그리고 총감에게 제출하라고 지시했다(일한합방비사). 「다께다」가 1착으로 서울에 왔다. 그때 항간에선 일진회가 동소문밖 화계사에서 합방성명서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몇몇 신문도 이 낌새를 크게 보도했다 12월1일 만반의 준비를 한「우찌다」가 서울로 들어왔다. 그는 이용구 송병준 「다께다」와 밀회했다. 3파 연합으로 합방건의서를 발표하기 어렵다는 보고를 들은「우찌다」는 일진회단독으로 합방건의를 하라고 단안을 내렸다.
그런데 합방건의서의 문안에서 약간의 의견차이가 있었다. 송병준·「우찌다」등은 명실상부한 합방을 주장한데 반해, 이용구는 「정합방」론을 내세웠다.

<흑룡회조직 총동원>
「다께다」 의 회고록 『죽동야화기』에 나오는 이용구의 정합방론을 더듬어 보자.
『유럽 열강의 예를 보면 두나라가 군주는 같아도 정치를 달리하는 경우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있다. 이것은 군합방이라한다. 이와 달리 군주는 서로 달라도 그 정치를 같이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바로「정합방」이다. 또 군주와 정치를 달리하면서도 두나라가 한나라로 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연방이라한다. 내 생각으로는 한국을 일본에 합하는 것은 바로 정합방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일본울 종주국으로 해서 보호국 한국이 합해지는 것이 아니다 종주국과 보호국과의 관계에는 세가지가 있는데 현상·위임·합병이 그것이다. 이중에서 특히 합병은 군을 쫓고 민을 노예로 만드는 것이다….』 이용구에 있어선 그의 생각대로 합방이 되면 한국민은 지금까지의 일본의 보호상태에서 일약 일등국민이 되며 한국황실도 일본 황실처럼 만세일계로 보존 할수 있을 것이라고 환상했다는 것이「다께다」가 남긴 얘기다. 이용구의 2세 대동국남(한국명 이석규)이「이용구의 생애」라는 글을 통해 그의 아버지는 매국노가 아니며 일본인에게 기만당했다고 주장한 근거도 이 정합방론에 근거해 있지만….
아뭏든 초안을 둘러싼 토론애서「우찌다」와 송병준은 이용구의 주장을 받아들여 합방건의서와 함께 일진회가 국민에게 보내는「일진회정합방섬명서」를 채택했고 결의사항에서도 「한국황실은 영구히 안전케할것」 이라는 조항을 첫머리에 담았다. 「우찌다」등 일본인 고문들로선 합방건의서롤 채택하는것 자체가 중요했지 그것이 합방이든 합병이든 별 문제가 아니라는 속셈에서 이용구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12월2일 이용구등은 대한협회와의 마지막 협상이 실패하자 곧바로 서울에 있는 2백여명의 회원들만으로 긴급총회를 열었다. 회의실 문은 회원입장이 끌나기가 무섭게 완전 밀폐했다.
『한국민은 일본의 성의를 인정하지 않고 그 지도계몽을 반대해온 결과 이제 우리의 국권을 일본에 넘기지 않을수 없는 시점에 왔다』는 요지의 이용구의 연설이 있었다. 짜여진 각본대로 해 회원이 올라와 국민에게 보내는 합방성명서를 발표했고 합방건의서도 이론없이 채택했다.
①한국황실을 영구히 안전하게 할것②한국정부를 폐지하고 일본정부가 정령을 행할것③통감부를 폐지할것④일진회만 남기고 기타 단체는 해산할것등 4개항의 결의도 통과했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12월4일 소위 일진회의 합방성명이 발표되자 커다란 파문이 일어났다.

<쓰기야마의 축전>
대한매일신보는 일진회 성명을「노륜선언」이라고 규정, 그들의 반민족행위를 규탄했다. 대한협회·서북학회·국시유세단·한성기독청년회등 각 단체에서는 일진회의 매국을 성토했다.
총리 이완용은 황제 및 총리에게 보내진 건의서를 각하했다. 통감「소네」도 일진회의 건의를 무시하는 태도로 나왔다. 이완용은 합병추진에서 일진회에 의해 기선을 제압당하자 자신의 정치적 세력을 잃을까 두려워했고, 대한협회는 대한협회대로 합병이라는 대사추진에 있어 일진회에 뒤쳐진 것을 애석해 했다.
통감「소네」는 「소네」대로 당시 병중이었을 뿐 아니라, 통감취임때 「이또」- 「가쓰라」-「소네」 3자간에 자신의 임기 중엔 합방문제가 없으리라는 다짐을 받아둔 터여서, 「가쓰라」 「데라우찌」등의 사주를 받았음이 분명한 일진회의 합방건의에 개인적인 불만을 품고있었다.「우찌다」 등은 각하된 상소를 다시 올리는 한편 서울의 보부상조합인 대한상무조합등을 매수해 이들로 하여금「일진회합방성명 찬성동지회」 라는 유령단체를 조직해 합방찬성운동을 벌이도록 했다. 그와 함께 일진회고문단은 혹룡회를 동원, 일본정부에「소네」통감을 교체하드록 하는 운동을 폈다.
12월21일 이용구는 합방을 청원하는 진정서를 일본수상「가쓰라」에게 보냈고, 28일에는 일본 중의원 앞으로도 같은 내용의 진정서를 보냈다.
이런 와중에서 일본정부당국이 다행 (?) 으로 생각한 것은 한국민 사이에 과거 을사보호조약 체결이나 군대해산때에 보여준 거족적 무력항쟁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었다.
1910년2월「가쓰라」는 지금이야말로 병합을 실행할 적당한 시기가 왔다고 판단, 일진회고문「쓰기야마」를 불러 일본정부의 합병정책을 알려주고 적절한 조치를 지시했다.
이때「가쓰라」 가「쓰기야마」에게 전해준 각서의 내용은▲일진회의 합방건의서는 적절히 수리하고 합방반대의견서는 모두 기각한다▲합방론의 찬동여부는 어디까지나 일본정부의 방침과 활동에 관한 사항이므로 이에 대한 한국민의 어떤 형태의 간섭도 용납치 않는다▲일진회가 과거 오랫동안 친일의 지조률 지켜왔을 뿐 아니라 일한양국을 위해 전력해온 성의는 충분히 이해한다는 것이었다.
「가쓰라」로부터 각서를 받아든「쓰기야마」는 서울의 이용구 송병준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축전을 보냈다.
『일진회의 목적은 관철됐다. 나는 이곳 도오꾜에서 「우찌다」등과 함께 축배를 높이 들고 만세를 부른다. 이제 그대들을 위해 만세를 보내는 바이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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