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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전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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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1951년 1월. 한국의 수명이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던 순간. 1월4일 서울철수가 이루어지고 중공군은 연천∼서울간 가로를 진격하고 있었다.
8일엔 유엔군이 원주를 철수했고 적은 오산을 점령했다.
그런 전황속에서 미합참은 9일 유명한 작전지침서를「맥아더」원수에게 보냈다. 「필요하다면 한국에서 일본으로 철수하라」-.
그러나 미국의 이같은한국전에대한 비관은 월씬 전부터다.
50년12월1일 아침 미합참본부희의실에서 있던 전황회의다. 『전쟁후 처음으로 미국이 패전을 인정하거나 한국에서 손을 완전히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토의되었다』고 「초체프·굴든」의『한국전쟁』은 밝히고 있다. 그 기록은 「미합참본부희의기록」에도 수록되었다.
그때「포fp스트·셔먼」해군대장의유명한 전략개념이 개진됐다.「일목으로 철수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한국포기는 일본에 위험할 것이다. 미국은 장기적 전략계획으로 한국의 허리부분을 고수해야한다」 는 것.
그러나 미국무성과 「맥아더」사령부는 항전 주장을 고수했다. 그때 미군철수의 비극을 막은 것은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리지웨이」미8군사령관의 용기였고, 다른 하나는 한국군의 결사적 반격작전이었다.
「리지웨이」는 중공군의 대공세가 시작된 섣달 그믐날 한국전선에 도착했다.
그는 우선 패전이 임박했고 미군의 철수는 시간문제라는 소문부터 씻어내고 지연작전과 방어, 그리고 공격으로 이어지는 무제한 장기전태세의 신념을 우선 장교들에게 주입했다.
유엔군의 반격은 1월25일 시작됐다. 26일엔 수원이 수복되고 28일 북괴군 2군단이 영월과 단양에서 괴멸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이 반격에 앞서 1월13일 「트루언」으로부터 긴개인적 편지를 받았다. 그것은「유엔군이 한국에서 축출된다면맥아더가 제주도나 다른 섬에서계속 저항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도 우리의 철수는 거사적 필요성에 의한 것이고중공이 침략을 중지할 때까지 우리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세계에 인식시켜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 편지를 받고 「맥아더」는 비로소 「이제 철수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황의 호전에 따라 2윌2일「러스크」국무차관보는 참전국 대사들에게「적은 유엔군을 몰아낼 능력이없다」고 확인했다.
오히려 2월12일자 「무초」주한미국대사의 전황보고엔「적의 절정적 패배가 임박했다」는 악관이 나왔다.
1951년 1월 한국은 누구도 모르게「월남」꼴이 될뻔한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반전된 역사속에 살면서 공개원「한국전비록」을 보고다만 안도의 한숨만 쉬는 것만으론 충분치 않다.
사가둘만이라도 암흑의 순간과역사의 보환을 밝혀두어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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