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대신 뉴올리언스 구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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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반전 시위대가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 주변에 모여 이라크전 반대와 미군의 즉각 철수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이날 워싱턴에는 이라크전 개전 이래 최대 규모인 15만여 명의 시위대가 운집했다. [워싱턴 로이터=뉴시스]

24일 낮 미국 워싱턴 일립스 공원. 백악관 남쪽 광장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둔 이곳에 15만여 명이 모였다. 이라크전 반대 시위를 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의 상징으로 높이가 169m나 되는 기념탑 앞에는 성조기에 덮인 관 수십 개와 하얀 십자가 수백 개가 놓여 있었다. 지난 여름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크로퍼드 목장 앞에서 벌어진 반전(反戰) 시위의 상징물이 워싱턴으로 옮겨진 것이다.

시위대는 저마다 '미군을 미국의 품에' '이라크 대신 뉴올리언스를 구하자'는 등의 반전 메시지가 적힌 피켓을 들고 공원 주변을 행진했다. 피어싱을 한 10대 소녀, 퇴역군인 모자를 쓴 60대 노인 등 남녀노소가 한마음이 됐다.

10대의 두 아들과 함께 멀리 일리노이주에서 왔다는 여성 뎁(43)은 "올 1월 부시 대통령 취임식 때도 이곳에서 반전시위가 열렸지만 수천 명이 참가했다. 그때와 오늘은 너무 다르다"며 "대세는 우리 편에 있다"고 주장했다. 기자가 "한국도 이라크에 3000명이 넘는 병력을 파견했다"고 하자 뎁은 놀란 표정으로 "처음 듣는 얘기인데 한국군도 빨리 철수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두 딸을 유모차에 태우고 시위에 참가한 톰 데이비스(34)는 "이렇게 많은 사람을 보라. 부시를 뒤흔들 진짜 허리케인은 텍사스가 아니라 이곳에 있다"고 주장했다.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에서 부인과 두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온 애덤 스미스(23)도 "오늘은 이라크전이 베트남전으로 변한 첫날"이라며 "민심은 이제 반전으로 기울었다"고 큰소리쳤다.

시위 참가자들에게 "미국이 당장 철군하면 이라크에 혼란이 발생할 우려도 있지 않느냐"고 했더니 모두들 "유엔에 맡기면 된다. 유엔 깃발 아래 필요한 미군만 남기고 철군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시위 현장에선 부시 대통령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노골적으로 표출됐다.

시위대 다수가 "부시를 탄핵하자"는 피켓을 들고다녔고, 시위용품을 판매하는 좌판에선 '부시=히틀러' '광우병 대신 광목동병(Mad Cowboy Disease)부터 일소하자'는 구호가 적힌 배지도 불티나게 팔렸다.

그런 가운데 전쟁에 찬성하는 이들의 맞불 시위도 있었다. 이들은 "이라크에서 싸우는 미군들을 욕보이지 마라" 등이 적힌 피켓을 들었다. 동생이 이라크 주둔 미군이라는 민디 니클로스키(31)는 "반전 시위대가 미국인 대다수를 대변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공원에서 양측은 잠시 고함을 지르며 대치하기도 했지만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양측 시위대의 지도부가 나서 "첫째도 자제, 둘째도 자제"라며 분위기를 진정시켰기 때문이다.

이라크전 이래 미국에서 최대 규모의 반전시위가 벌어진 이날 부시 대통령은 워싱턴에 없었다. 허리케인 리타에 대한 대응태세를 점검하기 위해 텍사스로 날아갔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은 리타의 피해가 예상보다 작다는 보고를 받고 한숨 돌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반전 분위기는 갈수록 확산하는 형국이어서 그의 마음이 편할 것 같지는 않다.

강찬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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