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치훈의 눈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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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조치훈은 눈물이 많다. 지금부터 9년전 일이다. 일본 기원선수권이라는 타이틀에 처음으로 도전한 그는「사까다」 (판전) 9단에게 첫 두국을 보기 좋게 내리 이겼다. 이제 한국만 더 이기면 18세의 최연소타이틀 보유자가 되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조치훈 소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낙심한 것이다. 그는 내리 두국을 졌다. 드디어 마지막 한국- 그는 거의 다 이겨나갔다.「사까다」9단이 돌을 던지기만을 기다릴 판이었다. 이때 뜻하지 앉은 이변이 일어났다.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실책을 하고만 것이다.

<평범한 인간이지만>
그날 조치훈은 손안에 다 넣었던 승리를 놓친 분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밤새워 울었다. 그러나 그때의 쓰라린 경험이 그의 바둑세계를 한결 더 깊게 만들 것이라고 나는 「분수대」 에서 점친적이 있다.
그 후에도 그는 잘 울었다. 명인전을 이기고 나서 그는 보도기자들을 맞기전에 옆방에 물러나서 한참동안 눈물을 흘렸다. 그러지 않고서는 복바쳐 오르는 감격의 소용돌이를 가눌 길이 없었던 것이다.
엊그제 또 그는 가장 큰 소원이던 기성위를 따낸 순간 기쁨의 눈물을 보도진 앞에서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그가「기성」이요, 「명인」이라 해도 역시 그는 눈물 많은 인간인 것이다. 마지막 7국을 끝낸 그의 자리에는 토막난 성냥개비가 수북이 널려있었다. 담배를 안 피우는 그는 성냥개비를 꺾어나가며 대국중의 괴로움· 흥분· 초조함등을 달래어 나갔던 것이다.
이번의「통일천하」를 두고 사람들은 조치훈의 기재만을 얘기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58세의 「후지사와」(등택)를 누를만큼 원숙해진 27세의 조치훈의 인간적 깊이를 본다. 이는 일꼽번의 결전 하나하나에 반영된 두 사람의 심리에서도 엿보인다.
제1국을 맞으며 조치훈은 매우 흥분하고 있었다. 그는 그냥 이기고 싶지가 않았다. 뭔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바둑을 두고 싶었다. 그는 『지금까지 없었던 것, 안 해본 것을 시도해보려 했다』 고 나중에 자인했다. 『욕심이 너무 많았다』 고도 말했다. 그에게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그가 명인전을 이겼을때만 해도 일본기계는 비교적 담담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본인방 타이틀까지 따낸 다음에는 사정이 달랐다. 수백명의 일본전문기사들이 모조리 한국청년 한명을 당해내지 못한다는 것은 여간 굴욕적인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 그의 바둑은 끈기의 바둑일뿐이라는 평이 나왔다. 자기 바둑을 두는게 아니라 실리만을 찾아 조심스레 두어나가다가 남의 실책이 나오기만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 품격이 없는 기풍, 멋이 없는 바둑이라고 헐뜯기도 했다.

<명국만을 생각하다>
이런게 은근히 조치훈의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이번에는 조금도 뒷말이 나오지 않을만한 명국을 남겨놓겠다고 크게 벌렸을게 틀림이 없다.
이길 자신은 있었지만 그냥 이기는 것만으로는 재미가 없다고 여긴 것이다. 그것은 그로서는 당연히 가질만한 기백이요, 명인다운 욕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제1국은 완패하고 말았다. 그럴리가 없다며 계속 새 스타일을 쓴 제2국에서도 그는 졌다.
제3국에 이르려는 그는 새 스타일을 버려야했다. 그러나 이때 그는 오기에 사로잡혔던 모양이다. 역시 그는 젊은이였다. 그는 계속 자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세바둑을 두어 나갔다. 그러면서 멋스럽게, 이기려고만 했다.
이리하여 그는 것 세판을 내리 지고 막판에 물리게된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그것은 여간 다행스러운게 아니었다. 만약에 3연패가 아니라 1승2패로 진행되었다면 기성전은 어떻게 끝났을지 모른다. 그만큼 바둑이란 미묘한 심리의 작용을 크게 받는 것이다.
3연승을한 「후지사와」9단은 그때부터 마음이 풀렸을 것이다. 나머지 네판중에 한판만 이기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누워서 떡 먹기라고 생각할만도 했다.
조치훈도 비슷한 생각이었을 것이다.「기성」 타이틀만을 지키기 위해 바둑을 두어온 「후지사와」 9단을 상대로 내리 네판을 이긴다는 것은 거의 기적과도같다고 봐야 옳았다.
이때부터 조치훈은 모든 욕심을 버렸다. 이겨야겠다는 욕심까지도. 그저 좋은 바둑을 두겠다는 생각만이 남았을 것이다.

<욕심 없었던 "황제">
「후지사와」 9단은 제4국을 졌을 때에는 태연할 수 있었다. 제5국을 둘때에도 얼마든지 호방한 여유를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제6국을 맞을 때의 그는 몰린자의 불안스러움과 초조함을 억누르느라, 여간 애쓰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에 이판으로 서로가 3대3이 되어 막판에 몰리게 된다면 아무래도 막판에 몰린쪽 보다는 몰아넣은 쪽이 더 심리적으로 유리해지는 것이다.
한편 조치훈으로서는 제6국을 이긴다는 것은 횡재하는 것이나 같았다. 대국도중 심한 기침감기로 의사의 진찰을 받아야했다지만 그런 육체적 고통은 「후지사와」 9단의 심리적 고통에 비기면 별게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제6국에서 「후지사와」 9단이 어처구니없게 진 것도 이를 말해주고 있다.
드디어 마지막 제7국. 그것은 단순히 기사끼리의 보과 세의 대결이 아니었다. 서로 상처를 주고받은 두 영웅이 천하를 걸고 지력· 체력· 기력을 다하여 마지막 결전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집념과 의지의 결정>
싸움은 처음부터 조치훈에게 유리했다. 막판으로까지 몰고 간 것만으로도 자위할 수 있다는 마음의 여유가 그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후지사와」 9단의 마음은 편안치가 않았다. 이게 결국 1백45수의 패척을 부른 것이다.
조치훈은 1백42수를 놓을 때까지만 해도 약간 불리했다. 따라서「후지사와」는 순하게 받아두기만 했어도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를 않았다. 단숨에 승리를 보다 확실하게 만들려는 초조한 마음이 과수를 낳게한 것이다. 혹은 또 백의 1백42수를 보고 문득 패씸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동안 조치훈에게 시달려온 울분을 여기서 풀어보자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아무리 몇번이고 더듬어봐도 신나는 역사적인 대역전극이었다. 그리고 평범한 우리들처럼 눈물도 많은 그 주인공이 자기를 이겨나가는 오랜, 외로운 싸움을 통하여 완성되어나간 자랑스런 인간승리보를 우리는 그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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