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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시장 세대'와 '미생 세대'가 공생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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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정철근 기자 중앙일보 에디터
정철근
논설위원

“우리가 고생고생해서 얻은 일자리가 ‘저질’이면 누가 제일 힘든지 생각해 보세요. 우리도 힘들지만 엄마·아빠한테 용돈도 못 드리고 내복 한 번 못 사드릴 거라고요. 손자 볼 생각은 꿈에도 마시고요. ”

 지난 연말 연세대·고려대에 나붙은 이른바 ‘최경환 대자보’의 내용이다.

 새해 둘째 날 고려대를 찾았다. 하지만 정경대 후문에서도, 중앙도서관 앞 게시판에서도 대자보들을 볼 수 없었다. 방학인 데다 연초라 그랬을까. 2013년 말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열풍이 불었을 때 분위기와는 많이 달랐다. 당시 정경대 후문 쪽 벽면은 경영학과 학생이 쓴 원본과 이를 지지하는 대자보로 빈틈을 찾을 수 없었다.

 ‘안녕들 하십니까’와 ‘최경환 대자보’의 내용을 비교해 봤다. ‘안녕들 하십니까’는 코레일 노조 파업, 국정원의 대선 개입, 밀양 송전탑 반대시위 등 정치·사회 현안을 부각했다. 반면 ‘최경환 대자보’는 청년층 일자리 문제를 주로 다뤘다. 특히 최 부총리의 ‘정규직 과보호’ 발언에 대해선 날을 세웠다. 사실 취업을 앞둔 대학생들에게 ‘정규직 과보호’란 말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대학을 졸업하고 정규직으로 취업하는 것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2013년 기준 대졸 이상 비정규직은 196만 명이나 된다. 10대 대기업의 비정규직 비율도 36.3%(43만4000명)에 달한다. 그나마 취업하기가 힘들다. 우리나라 30세 미만 청년층 고용률은 외환위기 때 수준이다.

 고용 안정성이 나쁘면 유연성이라도 좋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노동시장의 안정성과 유연성 모두 고용 선진국에 비해 매우 떨어진다. 한국경제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동시장은 프랑스·그리스 다음으로 경직돼 있다. 노동시장의 안정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비교 대상 22개국 가운데 취하위다. 한 직장을 오래 다니기도 힘들고, 직장에서 나갈 경우 다른 일을 구하기도 어렵다는 얘기다.

 정부가 최근 비정규직 종합대책을 내놓았다. 기간제 사용기간을 현행 2년에서 4년으로 늘리 는 등의 대책을 담고 있다. 하지만 노동계와 재계 모두 반대하고 있다. 재계는 “정규직 과보호에 대한 대책이 안 보이며 기업에 과도한 부담을 준다”는 입장이다. 노동계는 “비정규직을 오히려 늘릴 우려가 있다”며 ‘장그래를 죽이는 법’이라고 비난한다. 민주노총 사상 처음 직선제로 당선된 한상균 위원장은 노동계 총파업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어느 때보다 노사정의 대타협이 필요한데, 노사는 서로 마주 보며 파국을 향해 충돌할 모양새다.

 정규직 강성노조가 주축인 민주노총은 통상임금 , 정년 연장 등에서 기득권을 양보할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인다. 공무원노조도 나중에 후세대들의 부담이 늘어나든 말든 공무원연금 개혁에 거세게 반대하고 있다. 대기업들 역시 박근혜 정부 초기, 정권 협조 차원에서 반짝 늘렸던 신규 채용을 줄일 태세다. 정년이 60세로 연장되면 청년 일자리는 더 부족해질 게 분명하다. 이대로 가면 노사 간, 계층 간 갈등을 넘어 세대 간 투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크다.

 “내는 그리 생각한다. 힘든 세월에 태어나가 이 힘든 세상 풍파를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 기 참 다행이라꼬.”

 많은 젊은이가 영화 ‘국제시장’ 주인공 덕수의 독백에 눈시울이 뜨거워졌을 것이다. 하지만 “회사가 전쟁터면 밖은 지옥이다”는 드라마 ‘미생(未生)’의 대사에 더 공감을 나타낸다. 젊은이들에겐 할아버지 세대의 노고에 대한 감상보다는 여전히 풍파 속에 있는 현실이 훨씬 절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청년들은 미생이라도 취업하고 싶고, 완생(完生)을 꿈꾸기보다 직장에서 잘려 ‘사석(死石)’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우리가 취업 못하면 부모님 세대도 죽어난다고요. 청년을 ‘봉’으로 알면 우리는 순순히 연금을 내주지도, 집을 사 주지도 않을 거란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대자보는 이렇게 ‘협박’하고 있다. 최경환 개인이라기보다는 기성세대를 향한 경고다. 세대 간 갈등으로 인한 파국을 막으려면 현재의 기성세대가 기득권을 양보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야 ‘국제시장 세대’와 ‘미생 세대’가 서로 소통하면서 지속적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정철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