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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새 풍속(41)녹음테이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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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휴일인 지난 6일 상오 10시쫌 서울 방배동 삼호아파트 5동 정막려씨(39)집. 응접실에는 정씨의 서울 E여고 동창생 6명이 모여 예배를 보고있다.
응접실 가운데 놓인 카세트에서 이들이 다니는 여의도동 S교회 J목사의 설교가 흘러나온다.
예배실황이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하게 실린 녹음에 따라 정씨 등은 찬송가도 부르고 사도신경을 외기도 한다.
이들은 이날 부부동반 야유회를 갖기에 앞서 집합장소인 정씨 집에서 「카세트 예배」를 드린 것.
교회에 다녀오면 스케줄에 차질이 올까봐 카세트 예배로 대체한 것이다.
정씨는 『가능하면 교회에 빠짐없이 나가지만 급한 용무가 있을 때는 부득이 「카세트 예배」를 드린다.』고 했다.
카세트의 대량보급은 신앙관행뿐 아니라 판매작전, 생활정보제공, 고소·고발이나 함정수사에도 이용되고 가정학습 패턴을 바꾸는 등 우리생활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유명 목사의 설교와 「금강경」, 「반야심경」 등 경전과 「회심곡」, 「강엄염불」 등 불교음악 20여 종이 녹음테이프로 제작돼 시중에 대량 판매되고 있다.

<편지대용으로 이용>
휴일 조그마한 암자에서 주지스님의 독경소리 대신 고승의 「카세트 염불」을 흔하게 들을 수 있다.
부처님과 중생사이에 기계가 끼어 드는 듯한 이질감을 약간은 느끼지만 가정에서도 손쉽게 불경과 접할 수 있어 크게 인기를 끌고있다.
S, Y, C교뢰 등 유명교회 목사들의 설교가 담긴 카세트는 9백원(매주 제작) 정도이고, 불경 카세트는 1천원 내외. 「학습용 카세트」가 범람하더니 요즘은 과외금지 후 올림픽과 아세안 게임을 앞두고 어학카세트가 판을 치고있다.
교보문고에서 판매되고 있는 녹음테이프는 1백90종. 어학교재 외에도 고시강좌·꽃꽂이·시집(시집)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외국어 카세트만도 성인용의 경우 영어 83종, 일본어 20종, 불어 9종, 중국어 9종, 기타 외국어가 5종이며 아동용도 영어가 15종, 학습용은 영어 16종으로 여러 종류의 테이프가 나왔다.
서울 미아동 S고교 2학년 국어시간.
성우들이 낭송하는 박목월·김영랑·서정주 선생의 시가 녹음돼있는 테이프를 틀어주면서 시 감상을 한다.
국어담당 오인환교사(31)는 『카세트 테이프 덕분으로 시 감상을 제대로 학습시키고 있다.』면서 『학습능률을 올리는데 효과가 크다.』고 말했다.
이 학교 2학년 3반 김호중군(17)은 자타가 공인하는 「녹음 테이프광」. 김군은 소형 카세트에 교사의 강의 내용을 담아 집에서 복습한다.
김군은 『테이프를 틀어 놓고 노트에 적힌 내용을 반복하면 효과가 커 특별한 참고서가 필요 없다.』고 말했다.
녹음테이프는 생활정보 제공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기상예보를 알려주는 안내전화, 세종문화회관 공연안내, 수산물시세 안내전화, 시간안내, 구인안내 등 전화만 걸면 자동으로 녹음된 정보가 흘러나온다.
앞으로 이러한 「녹음 정보」 시스팀은 더욱 다양해질 것으로 보인다.
목소리의 효과는 편지의 애틋한 사연보다 훨씬 감동적일 때가 많다. 편지대용으로도 애용되고 있다.
서울 화양동 대동연립주택 김수인씨(37)의 장녀 미정양(9·화양국교 3년)은 매주 토요일 중동에서 취업중인 아버지 김씨에게 보내는 사연을 카세트에 취입한다.
미정양은 60분 짜리 테이프에 학교생활·엄마근황·우리 나라 소식 등을 자세히 옮겨놓는다.
자연의 소리를 녹음테이프에 담는 사람도 적지 않다.

<공갈 등 악용될 소지>
『찌르르…찌.』 서울 중화동 경희대 생물학과 윤무부교수 집에는 겨울철인데도 아침이면 여름철새인 휘파람새의 맑은 소리가 울려 퍼진다.
윤교수가 지난해 7월 경기도 광릉에서 집음기(집음기)에 담은 새소리 중에서 가장 맑은 소리를 낸다는 휘파람새의 소리다.
윤교수는 지난 2년간 40여 종의 새소리를 녹음, 현재 카세트에 옮기는 작업을 하고있다.
윤교수는 『자연 속에서 내는 새소리는 새장이나 인공 사육된 새의 소리와 다르다.』면서 「새소리 녹음」의 작업을 계속해 금년 안에 1백여 종의 새소리를 담아 보겠다고 했다.
자연의 소리를 녹음해 옮겨 듣는 동호인들도 생겼다. 「자연의 소리 동우회」(회장 설인영·30·서울 한남동). 설씨는 『여행이 잦다 보니 물, 바람, 파도 소리 그 자체에 매력을 느껴 녹음을 했다.』면서 『동해안 일출시의 파도소리, 설악산계곡의 얼음 밑으로 흐르는 물 소리 등은 신의 계시와도 같다.』고 말한다.
동호인들은 각자가 여행 때 녹음해온 자연의 소리를 듣는 감상회를 매달 1차례씩 갖고있다.
지난 11일 하오 서울 신촌 대학가 입구. 30대 리어카 행상의 스피커에서 엉뚱한 학교안내방송이 흘러 나온다. 『Y대는 12일 하오 2시 맞수 K대와 축구경기를 벌입니다. E대 문과대 신입생 환영회는 13일 과별로 강당에서 합니다.』
리어카 행상 이대홍씨(36)는 지나가는 학생들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책가방을 헐값에 판다고 소리친다.

<불량-저질품 범람>
지난해 12월 중순 서울 강남경찰서. 전세금 1천만원을 사기 당한 이모씨(41·여)가 피의자의 진술을 담은 테이프를 증거로 제시했다. 이씨는 피의자 김모씨가 범행을 부인할 것을 예상하고 미리 다방에서 만나 자연스럽게 얘기를 나누다가 『전세금을 되돌려주지 않았다.』는 말을 유도, 몰래 녹음해 두었던 것. 피의자 김씨는 경찰에서 극구 부인하다가 녹음을 틀자 말문을 닫았다.
녹음테이프의 영향력이 이처럼 막강해지고 이용이 크게 늘자 테이프산업이 번창, 현재 전국에 4백여개의 유·무허가 회사가 난립하고 있다. 녹음테이프의 편리는 이처럼 생활의 변화까지 몰고 왔지만 공갈이나 인권을 짓밟는 지나친 함정수사나 자백 등 테이프의 악용으로 인한 부작용 또한 적지 않다.
또 불량·저질테이프의 범람도 「녹음시대」가 낳은 문화를 그늘지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있다. <박보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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