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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둥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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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중국 단둥(丹東)에서 은밀히 북한 주민을 돕는 A씨는 요즘 새 전략을 쓴다. 10여 년 해 온 무상원조를 줄이고 유상을 늘렸다.

전엔 옥수수나 밀가루를 사주면 북한 주민 입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이젠 다르다. 형식상 중국인이 대표인 회사가 수백t의 곡물을 사주면서 15%의 이윤을 얹어 북한 장마당에 팔게 한다. 옥수수는 t당 200달러, 밀가루는 220~250달러에 사서 준다. 판매대금에서 원금은 회수하고 이윤은 나눈다. 신의주를 통해 북한으로 퍼진 곡물은 돈으로 바뀌어 단둥으로 나온다. 중국돈.달러.유로.남한돈.엔 모두 모인다. 북한돈도 하루 20억~25억원 규모를 소화하는 단둥의 외화 암시장에서 척척 소화된다. 돈 대신 임가공도 된다. 메주 1000달러어치를 주고 된장을 만들게 하는 대신 1000달러어치 곡물을 준다.

B씨도 방향을 바꿨다. 얼마 전 늘 퍼주던 신의주의 북한 주민에게 20t 어선을 하나 사줬다. 일을 해서 배값도 조금씩 갚고, 먹고 살라는 취지였다. 그 주민은 물고기나 꽃게를 잡아 여러 명 먹여 살린다.

A.B씨가 지원 방법을 바꾼 데는 이유가 있다. 공짜의 부작용 때문이다. 다른 곳을 지원하거나, 형편이 나빠 못 돕게 되면 사정없이 "떼먹는다"는 욕이 돌아왔다. 심지어 "조선을 팔아 착복한다""굶어 죽는 북한 인민을 팔아 사욕을 채운다"는 매도도 당했다.

이건 아니다 싶어 방향을 바꿨다. 탁아소.유치원엔 무상 지원해도 웬만하면 유상으로 한다. 고사리도 받고, 개구리도 받는다. 그 과정에서 '일을 해야 먹고산다'는 데 익숙해지는 선순환이 생겼다. A씨는 "공짜는 타락의 지름길이다. 또 오래 도우려면 돕는 쪽도 건강해야 한다. 북한에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며 결연하다.

그 '고기 잡는 법', 말하자면 시장경제 교육은 북.중 국경 지역에서 한창이다. 예를 들자. 1회용 가스 라이터는 얼마 전까지 중국의 독무대였지만 지금은 북한으로 상당히 넘어갔다. 중국이 하청을 주기 때문이다. 신의주 소재 K사는 월 3만 달러씩 수주한다. 미국이 주문한 Y셔츠.여성복 등 의류 임가공도 마찬가지다. 작은 기업이 한 달에 10만~30만 달러는 한다. 중고 타이어를 속칭 '쪄서'새걸 만드는 헌 타이어 사업도 한창이다. 중국제.일제.한국제를 안 가린다. 시장의 흡수력은 멀리 미쳐 산골 광산의 금 섞인 정광석도 보따리상에 의해 신의주를 거쳐 단둥으로 모인다. 돈이 아쉬운 북한 광산도 단둥에선 버젓이 상품으로 나온다.

단둥 주민은 그래서 중국의 하청 기지처럼 돼 가는 북한을 '돈산주의'라고 한다. 북한에선 돈, 특히 달러면 뭐든 다 된다는 뜻이다. 유쾌한 말은 아니지만 아무튼 단둥은 북한에 시장경제를 교육시키는 선생이 됐다. 사실 단둥-신의주 벨트만 아니라 중국 동북 3성의 북한 공략은 매섭다. 어쨌든 그렇게라도 북한의 북쪽은 시장경제로 달려가는데 북한의 남쪽은 아직도 DMZ의 한파가 매섭다. 개성공단도 시작 수준이고, 금강산 관광도 시장 원리보다 특혜 논리로 작동한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우린 개혁.개방이란 말로 북한의 시장경제화를 기대한다. 그럼에도 효율적인 교육 기회는 사장시키고 있다. 다시 단둥 얘기다. 그곳엔 한글 간판이 날로 는다. 북한의 물자 조달 담당관을 겨냥해 중국 기업이 세운 대리점들이다. 파견된 북한 관리들도 많다. 그중엔 북한판 386세대도 있다. 현지에서 TV로, 비디오로 늘 남한을 접하는 이들은 "우린 더 개방해야 한다""중국을 견제해야 한다"고 한다. 현실에 눈을 뜬 이들은 대개 혁명 1세대의 자녀들이며 해외유학파도 많다. 군부와 경제계의 실무 그룹이고 곧 북한의 주역이 될 세대다.

북한 386도 있고, 시장 교육 환경도 잘 돼 있는 곳이 단둥-신의주 벨트다. 그런데 현지에 정통한 한국인들은 정부가 이를 활용하는 종합 계획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정부가 기회를 날리고, 나라가 퍼주기 논쟁에 휘말리고, 뜻 있는 한국인들이 발을 구를 때, 중국은 이 벨트를 통해 북한을 야금야금 먹어가는 듯해 안타깝기만 하다.

안성규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