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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7)-제79화 육사졸업생들-장창국(10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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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국민과 국가에 엄청난 피해와 참화를 강요한 여순반란에 대한 책임을 누가 어떻게 질 것인가 하는 문제가 군으로서는 또 하나의 고통스런 과제였다.
반란이 일어났을 때 화를 면한 여수14연대의 장교와 사병들은 무조건 광주의 5여단에 구금됐다. 그 병력은 1개 중대에 달해 「잠정중대」로 불렸다고 한다.
또 광주의 4연대 출신 사병들도 거의 조사대상에 올랐다. 이 부대에 특히 좌익계가 많이 침투해 있었기 때문이다. 금지회·오일균 등 좌익장교가 4연대에 근무했고 여수반란의 주모자들인 지창수·정악현·신만호 등 상사급이 모두 4연대 1기생들로 14연대창설요원으로 차출되어갔던 것이다.
두 연대의 조사대상자들은 육본 조사반의 엄중한 조사 끝에 다수가 군재에 회부됐다. 적용 죄목은 폭동 불진압죄였다. 14연대장 박승훈 중령은 군재엔 회부되지 않고 직위해제만 당했다. 부임한지 12일만에 반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고려되어 가볍게 처리됐다고 들었다. 일본 육사 26기인 그는 육군 총참모장 이응준 장군과는 동기이고 국방부 참모총장 채병덕 장군(일본 육사 49기)의 선배였다.
채병덕 참모총장은 반란의 군내 최고책임을 14연대 부연대장 이희권 소령에게 지우려했다. 기소된 장교 중 그가 최고계급이었던 것이다. 죄목은 역시 「폭동 불진압죄」였다.
군재의 재판부는 장교 5명으로 구성됐고 재판장은 현 서울시 정화추진협의회장인 남군 군의관 출신의 신학진 대령(군영·예비역소장·경산)이었다. 심의결과 이소령은 전원일치의 무죄로 결정이 났다.
이를 보고 받은 채장군으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는 다시 투표를 해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역시 무죄로 결정되어 그대로 판결이 나고 말았다.
이소령은 채병덕 장군을 찾아가 「무죄신고」를 했더니 『재판장이 누구였나』고 물었다. 『신학진 대령입니다』고 했더니 『군의관이 재판할 줄 아나. 책임은 누가져야한단말야!』하면서 몹시 불쾌한 표정이었다.
이희권 소령은 이응준 장군에게 가서 역시 신고했다. 이장군은 『이 어려운 고비에서 살아난 게 천만다행』이라고 위로했다.
그때 전화가 왔다. 채장군이 이장군에게 한 전화였다. 『이희권이 무죄가 됐으니 군죄를 다시 하라』는 내용이었다. 후배가 윗자리에 앉아 부당한 명령을 한다고 생각한 이응준 장군도 불쾌했던지 순간 안색이 변했다.
그 자리에 있던 이소령이 『각하, 일사부재리원칙이 있으니 재심은 안 됩니다. 그 대신 내가 책임을 지고 사표를 내겠습니다』했더니 이장군은 『염려 말게. 내가 알아서 처리하지』했다.
이소령은 사표를 써내고 나와 군복을 벗었다. 49년1월이었다.
민간인이 된 이희권 소령은 그후 어느 날 육본(을지로입구 구내무부 자리 현 외환은행) 앞을 지나가게 됐다. 퇴근하던 최영희 중령이 보고 달려와 『너 잘 만났다. 복직하게 됐으니 당장 북직원을 내라』는 것이었다.
그때 이미 연대장 박승열 중령은 복직원을 내고 있었다. 박중령의 일본육사 동기인 신태영 장군이 육본 행정책임자로 있었는데 그가 복직원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때 이소령과 같은 학병출신에다 군영동기생인 육본 인사참모 최영희 중령이 반대하고 나섰다.
부연대장도 복직이 안 되고 있는데 연대장이 복직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신장군은 이소령이 복직원을 안 냈는데 무슨 복직이냐는 것이었다. 최중령은 이소령도 복직원을 냈다고 둘러댔다. 그래서 두 명 모두 복직시키기로 됐다.
최중령은 이소령의 소재를 수소문했으나 못 찾고 있었다. 복직 발령을 빨리 내라고 신장군이 독촉할 때마다 조마조마하던 차에 이소령을 만나게 된 것이다.
최중령은 『네가 복직원을 안 내면 난 모가지다』하면서 빨리 복직원을 써내라는 것이었다. 이래서 연대장·부연대장이 함께 원래의 계급대로 49년 5월 현역으로 돌아가 모두 준장까지 되어 예편했다. 박중령은 작고했다.
14연대 부관대리·행정장교·본부중대장·대전차중대장·식사관을 겸하고있던 김쇠규 소위(6기·예비역소장)는 서울에 교육파견을 나와있어 화를 면했다. 그는 신문호외를 읽고서 반란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기소된 다른 장교들도 대부분이 무죄였고 최고가 징역 6월이었다. 근신 20일을 선고받은 장교도 있었다. 그러나 거의가 복직되어 6.25를 치렀다. 이처럼 군의 폭동문책은 아주 가벼운 것이었다.
49년3월21일 이범석 총리는 국방부장관을 내놓았고 신성모씨가 후임 장관이 됐다.
반란부대인 14연대는 48년10월28일자로 해체되고 그 모부대인 4연대는 20연대로 개편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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