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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규 시인 8번째 시집 '처음 만나던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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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시인 김광규(62.한양대 독문과 교수)를 떠올릴 때 1979년 출간한 처녀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에 실린 대표작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빼놓을 수 없다.

'열띤 시국 토론을 벌이고 사랑과 아르바이트.병역 같은 때묻지 않은 고민을 하던 4.19세대가 십수년 후 중년이 되어 만나서는 월급봉투.물가.건강 따위를 걱정할 뿐 세상사 개탄은 술자리 안줏거리였다'는 시인의 토로는 소시민으로 전락한 혁명 세대의 이기주의.속물 근성에 대한 날카로운 고발이자, 21세기 386세대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경고로 여겨진다.

김씨가 여덟번째 시집 '처음 만나던 때'(문학과지성사)를 냈다. 98년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이후 5년 만으로, 그동안 틈틈이 발표했던 90여편 중 72편을 추렸다.

환갑.환력(還曆)이라는 연령 경험이 김씨의 시 세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처음…'의 세계는 '생활세계와 현실에 대해 태도가 열려 있고, 시적 언어가 자유롭다'(성민엽)'은유에 현란한 모호성이 없고 시의 뜻이 분명하고 건강하다'(이남호)는 김씨의 시에 대한 그간 평단의 평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하다.

김씨 스스로도 "단조로운 것 같지만 되풀이되는 과정 속에 어떤 매력이 있는 것 같다"며 신작 시집이 이전 시집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내비쳤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아 스무해 남짓 차고 다니던 가죽 허리띠가 끊어지자 이제 허리띠를 손자에게 물려줘야 할 때임을 깨닫고('끈'), 앞다퉈 피는 봄꽃에서 빛보다 빠른 초록색 속도를 읽는('초록색 속도') 시인의 예민함은 도리에서 벗어나는 주변의 볼썽사나움을 견디지 못하는 윤리적인 것이다.

선물만 챙기고 외로운 필적의 연하장은 내다버린 약삭빠름을 한탄하기도 하고('쓰레기'), 아파트 거실에서처럼 배멀미 없이 편안하게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보겠다는 생각은 염치없는 욕심이라고 지적한다.('배멀미')

"조심스럽게 물어보아도 될까…/역사 앞에서 한 점 부끄러움도 없다고/주먹을 부르쥐고 외치는 사람이/누구 앞에서 눈물 한번 흘린 적 없이/씩씩하고 튼튼한 사람이 하필이면/왜 시를 쓰려고 하는지…"('조심스럽게' 중)

위선과 잔인함, 약삭빠른 세태에 마음 상한 시인에겐 '티 하나 없이 떳떳하다'고 자만하며 시를 쓰겠다고 나서는 어떤 사람들의 모습도 불만스럽다. 차라리 일주문 앞 천막 노점에서 귀영하는 사병처럼 꼬치 오뎅을 사먹는 젊은 스님의 모습이 솔직하고 믿음직스럽다.('일주문 앞')

쉽게 읽히면서도 무릎을 치게 되는 통찰을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게 김씨 시집의 매력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김씨는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시 속에 내재적으로 존재하는 시어의 리듬에 주목해 줄 것"을 당부했다. 김씨 시의 리듬은 전통 시조의 율(律)과 같은 것이다.

가령 '형무소 있던 자리'의 앞부분인 "아직도 다도해 남쪽에서 봄이 머뭇거릴 때/서대문형무소 있던 자리에/때 이른 연녹색 잔디"에 그런 리듬이 깃들여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3행은 뚜렷하게 리듬이 일치하지는 않지만 각각 '아직도/다도해 남쪽에서/봄이 머뭇거릴 때''서대문형무소/있던/자리에''때 이른/연녹색/잔디'로 나뉘어 읽힌다는 것이다.

김씨는 스스로를 "천성이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말했다. "산을 가더라도 여럿이서 떠들썩하게 가기 보다 차라리 혼자 가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남은 시에 대한 희망은 "열번째 까지는 바라지 않고 아홉번째 시집까지만 내는 것"이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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