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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11집 앞선 경기서 의문의 '4패' 무승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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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석불의 진심은 무엇일까. 순환패는 동형반복을 끝없이 계속함으로써 운명적이면서도 필연적으로 무승부가 된다. 그러나 남방장성배에서의 '4패'는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이창호 9단과 창하오(常昊) 9단의 친선 대회였던 남방장성배가 '4패'로 인해 무승부가 됐다. 중국 후난(湖南)성의 봉황고성에서 벌어진 이 대회는 처음엔 소림사 무동 361명이 동원되는 대형 이벤트로 화제를 모았고 끝난 뒤엔 '이창호의 진심'이 화제가 됐다.

이창호는 창하오 9단에게 19승4패의 전적을 갖고 있다. 중국의 일인자였던 창하오는 이창호로 인해 고비마다 좌절을 겪어야 했다. 그것이 굳이 존재할 필요가 없는 4패 무승부를 이끌어낸 원인이었을까.

이번의 4패 무승부는 한국과 중국의 룰 차이, 이창호의 성격, 친선대국, 떠들썩한 야외환경 등 특수상황이 만들어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위적인 것이었고 다분히 해프닝이나 팬서비스에 가까웠다는 게 중론이다.

◆무승부 장면=<기보1>이 실전인데 바둑판엔 공배 하나 없다. 오직 4개의 패만 남았다. 백1로 따내자 흑은 2로 반패를 따낸다. 백은 3으로 하변을 따내고 흑은 4로 응수한다. 이때 백은 다시 △의 곳 반패를 따내며 버틴다. 다시 말해 이 바둑은 표면상 4패지만 사실상 두 기사가 좌변의 '한집'을 놓고 서로 버티는 바람에 동형반복이 계속됐다. 369수에서 이창호 9단이 대국 종료를 제안했다. 그렇다면 이 바둑은 진짜 반집승부였나.

◆간단한 승리의 길=거듭 강조하지만 말이 4패지 초점은 좌변의 한집짜리 패다. 따라서 이 판이 반집 승부였다면 서로 물러설 길이 없어 운명적으로 무승부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흑이 이기는 길은 간단하다.

<기보2>에서 보듯 일단 흑1로 하변 양패를 해소하면(중국룰은 자기 집을 메워도 손해가 없다) 백도 2로 이을 수밖에 없고 결국 판엔 3쪽의 반패만 남는다.

만약 흑이 이 마지막 패를 이기지 못해 반집을 지는 경우라면 무승부가 맞다. 그게 4패를 고집하는 유일한 명분이다.

그러나 이 판은 반패를 양보해도 흑이 11집이나 이긴다는 계산이다. 김수장 9단은 "세어볼 필요도 없는 차이"라고 말한다. 중국에서조차 "이창호 9단이 봐줬다""창하오의 치욕" 등의 얘기가 쏟아져 나온 것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상황이다.

◆이창호 9단의 설명=이창호 9단은 "계산을 할 수 없었다. 미세한 줄 알았다"고 말한다. 360수가 넘어 돌통의 돌도 다 떨어졌고 할 수 없이 서로 사석을 교환하며 바둑을 계속 두는 바람에 계산이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도 <기보2>에서 흑1로 잇는 것은 중국룰로는 손해가 없는 것 아니냐고 묻자 이 9단은 "룰을 깜박했다"고 대답했다.

보증수표란 별명을 지닌 이창호의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없다. 그러나 신산(神算)이라 불리는 이창호가 11집 이긴 바둑을 반집승부로 봤다는 것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승부 바둑도 아닌 데다 돌도 떨어지고 괴롭게 버티는 창하오의 딱한 처지를 보며 이창호가 화국(和局=빅)을 생각했을 것이라는 지적도 설득력이 있다. 다만 승부세계이기에 아무리 친선바둑이라도 봐줬다는 얘기는 할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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