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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희 색 다른세상] 상상력 자극하는 신비의 색, 마젠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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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참 아름다운 계절이다. 황혼 무렵 서울 한강변도 환상적으로 아름답다. 노을이 들어 붉었던 하늘빛이 마젠타(자홍색)로, 그 마젠타가 다시 청보라로 무너지듯 변해가는 모습의 한강변은 환상 그 자체다. 사실 색 감정에서도 보라는 '환상'이다. 과학적으로 볼 때도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 '빨주노초파남보'로 부서진다. 이 중 보라가 가장 마지막인 까닭은 파장이 가장 짧기 때문이다. 파장이 짧아 가장 마지막에 인식하고 기억되는 색. 그래서 보라는 현실과 환상 사이에 존재한다.

보라에는 청색에 가까운 청보라와 붉은 색에 가까운 붉은 보라가 있다. 바로 이 붉은 보라가 서양에서 '마젠타'라고 부르는 색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일반화하고 있는 명칭. 그러나 이 마젠타는 사실 프리즘에서 뿜어져 나온 빛의 '빨주노초파남보' 스펙트럼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젠타, 즉 붉은 보라는 상상의 색인 셈이다.

마젠타란 단어는 원래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한 마을 이름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이 마을은 이탈리아 통일전쟁 중에 격전지가 됐다. 사르디니아 왕 빅토리아 임마누엘 2세가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와 만든 연합군은 이 전쟁이 한창이던 1859년 5월 마젠타에 이르러 오스트리아와 대치에 들어갔다. 그리고 6월 24일 장대비가 내리던 날 연합군과 최후의 일격을 통해 오스트리아군을 격퇴하고 마젠타를 손에 넣었다. 그런데 바로 같은 시기에 이 마을에서 보라색 계열의 아닐린 염료가 발견됐고 덕분에 붉은 기운을 띠는 보라를 마젠타라고 부르게 됐단다.

국내에서도 마젠타가 활용된 주거공간이 선보인 바 있다. 지난해 9월 K건설이 분양한 아파트. 이 아파트는 자녀공부방 벽 색깔로 마젠타를 사용했다. 마젠타는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예술적 재능을 키워 준다.

역사적.지리적 매력과 함께 과학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도 신기한 마젠타. 하지만 마젠타는 귀함과 비천함, 신비감과 불안감 같은 인간의 모순된 감정들이 공존하는 불균형의 색이기도 하다. 따라서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현시키기도 하지만, 지나치면 불균형과 불안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한때 서울의 시내버스 색이 붉은 보라였던 시절이 있었다. 어쩌다 이런 컬러를 쓰게 됐는지 모르지만, 전문가들과 시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곧 사라지고 말았다. K건설도 이런 점을 충분히 고려한 모양. 그래서 이 회사는 '상상력과 자연의 만남'이란 테마로 아파트에 녹색 계통의 색들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또 자연을 상징하는 부드러운 질감의 원목을 사용하기도 했다. 마젠타의 불안과 불균형을 중화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상희 컬러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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