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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0)<제79화 육사졸업생들(93) 장창국>반란의 진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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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여순반란 당시 전라도지방에는 제5여단이 포진하고 있었다. 제5여단은 러시아군과 폴란드군에서 잔뼈가 굵은 김상겸대령이 수색에서 창설하여 광주로 이동해 있었다.
그 예하에는 반란부대인 14연대가 여수·순천지구에, 3연대(연대장 함준호중령·군영·6·25때 전사하여 준장으로 추서)가 전주·이리지역에, 4연대(연대장 이성가중령·군영·소장·작고)가 광주·나주지역에 전개돼 있었다.
한편 군산에는 원용덕대령의 제2여단(대전)예하 12연대(연대장 백인기중령)가 주둔해 있었다.
그런데 이 부대들이 속이 뻘겋게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제주도의 9연대나 여수의 14연대가 모두 4연대 요원들이 기간이 되어 창설됐는데 나중에 모두 사고연대가 되고 말았다.
47년4월에 순천경찰서를 습격하고 그해 6월에는 영암 군·경 충돌사건을 일으킨 것이 바로 4연대였다. 좌익장교 오일균도 4연대에서 암약하며 사병들을 포섭한 것으로 돼있다.
박기병소령(관동군출신·군영·예비역 소장)이 48년9월 4연대 부연대장으로 부임해 보니 장교들이 부대장비와 사병들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예가 빈번했다. 그래서 장비검열을 했더니 3분의1이 망실돼 있더라는 것이었다.
반란직전인 48년6월부터 김종석중령이 제5여단 참모장으로 있으면서 여단안의 좌익들을 비호하고 있었다. 각 연대에서 좌익을 적발하여 처벌하려 할 때마다 김종석이 개입하여 풀어주게 했다. 48년8월 그는 제6여단장으로 전출돼 갔지만 그가 심어놓은 좌익장교들이 남아 그 폐단은 그치지 않았다.
이를 참다못해 4연대장 이성가소령이 여단을 상대해서는 연대를 지휘해 나갈 수 없다고 육본에 사정하러 올라간 사이에 여수반란이 터지고 말았다.
반란 당시 이 지방의 부대지휘 계통에도 문제가 있었다. 제5여단장 김상겸대령은 제주도 경비사령관으로 발령받아 떠나고 후임여단장은 임명돼 있지 않았다. 여단참모장 오덕준중령은 여수에 출장나가 있었다. 육본에 간 이성가연대장도 아직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반란 초기에는 4연대 부연대장 박기병소령이 이지역에서의 지휘 책임을 맡고 군으로서의 1차적인 긴급조치를 취해야했다.
마침 그때 광주에는 육사교수부장 강영훈중령이 육군사관학교 모집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출장나와 있었다. 박소령은 강중령과 저녁식사를 같이하고 관사에 가있는데, 새벽1시쯤 경찰간부(이경감)가 연대장교의 안내로 박소령을 방문했다.
여수에서 경찰이 14연대의 기습을 받아 점령되고 경찰관들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이었다.
과거에도 군·경간의 충돌사건은 잦았지만 이번 사건을 심각하다고 느낀 박소령은 주번사령인 작전장교 박대위에게 지시하여 부대에 비상을 걸고 위병소와 무기고·탄약고·통신시설은 장교가 직접 장악하고 있도록 했다.
8월20일 아침 전남도청에서는 도내 각기관장과 유지들이 긴급회의를 열어 경찰국장의 상황설명을 들은 다음 대책을 숙의했다.
이들은 군대의 반란이니만큼 박소령이 맡아서 수습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런 요청을 근거로 박소령이 지휘권을 행사하여 우선 증강된 1개중대를 편성하여 여수로 보냈다. 그러나 이 부대가 순천에 도착하자 좌익 하사관들이 장교 8명중 7명을 사살하여 부대를 장악하고 반란군에 합류해 버렸다. 당시 육군참모차장 정일권대령이 21일 비행기로 광주에 내려와 상황을 살폈다.
그날 박기병소령은 1개대대를 이끌고 순천쪽으로 돌진했다. 당시 제주도 경찰국장으로 있던 최천씨가 전남도경차장(부국장)으로 와 있었는데 경찰에선 그를 순천에 보내 경찰을 지휘토록 했다.
박기병부대는 출동중 지나가는 기차를 세워 수색한 결과 반란군 1개소대가 타고 있어 그들을 고스란히 생포했다.
포로를 심문했더니 지금 국군의 모든 부대가 적화됐다. 김일성이 서울에 내려와 축하식을 갖게됐다. 우리는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로 가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내막을 모르는 부화뇌동자들인 것같았다.
부대가 구례의 어느 지서에 들렀더니 경찰관들이 모두 사살돼 유혈이 낭자해 있었다. 잠시후 겁에 질린 주민들이 닭과 술통을 들고나와 「인민해방군만세」를 외치며 환영했다. 반란군으로 오인한 것이다.
박소령이 『나는 대한민국 국군 제4연대 부연대장 박기병소령이다. 지금이 지역은 국군이 장악하고 있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국군의 작전에 협조하라』고 했더니, 이번엔 「대한민국만세」와 「국군만세」를 외쳤다. 당시 반란군도 똑같은 국군복장이었기 때문에 시절이 어려웠던 것이다.
한편 육군본부에서는 21일 반란 진압을 위해 광주의 제5여단 본부에다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사령관에 송호성준장을 임명했다. 송장군은 원용덕대령의 재2여단(대전)과 김백일대령이 새로 지휘관이 된 제5여단을 지휘하여 반란 진압에 나섰다.
전투사령부에는 4연대에서 3개대대, 3연대에서 2개대대, 12연대에서 3개대대, 그리고 대구의 6연대(연대장 김종갑중령)와 마산의 15연대(연대장 최남근중령)에서 1개대대식이 배속됐다.
이 여수반란 토벌 전투사령부의 참모장은 백선엽중령(육본정보국장)이었고 육본정보과장 김점곤소령이 정보참모였다. 당시 박정희대위는 작전참모로 종군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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