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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통령은 뭐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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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노무현 대통령은 독일의 슈뢰더와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가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의 승부수를 던진 것을 보고 "참 부럽다"고 했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뭐냐? 당을 걸고 승부할 수도 없고, 자기 자리를 걸고 함부로 승부할 수 있는 것도 제도화되어 있지 않고, 그렇다고 명색이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무책임하게 사표만 낸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었다.

책임정치에 대한 대통령의 강한 집념으로 평가받을 수도 있지만, 툭하면 자리를 걸고 승부수를 던지려는 무책임의 극치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분권형 통치와 탈권위를 금과옥조로 삼아온 대통령이 임기의 절반을 넘긴 시점에서 국민 지지가 낮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내각책임제하의 슈뢰더나 고이즈미 총리를 부러워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국민 심판에서 고이즈미는 활짝 웃었고, 18일로 예정된 독일 총선에서 슈뢰더는 패색이 짙어 보인다. 희비가 엇갈리지만 개혁의 지속 여부를 놓고 국민에게 직접 신임을 물은 점, 그리고 양국 국민선택의 지향점에서 적잖은 공통점을 읽을 수 있다.

고이즈미는 연립여당의 승리를 넘어 자민당 단독 과반수까지 거머쥐었고 '자민당은 개혁당'이라는 이미지 역전에도 성공했다. 우정 민영화는 고이즈미 개혁의 상징적 존재며 그것이 일본적 체제에 미치는 영향은 각별하다. 일본은 전후 관 주도의 고도성장을 해오는 과정에서 관료조직이 비대화됐고 민간의 손발을 묶는 규제로 제도화돼 자유로운 선택과 경쟁을 막아왔다. 경제의 글로벌화와 기술혁신 시대에 이 장애를 없애는 것이 고이즈미 개혁이며, 자산 3조 달러의 '세계 최대 저축은행' 우정공사를 관료적 경영에서 떼어내는 것이 그 출발점이었다. 앞으로 작은 정부와 경제효율화는 더 없는 탄력을 받게 됐고, 자민당 압승에 따라 일본의 우경화와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어지면서 우리에게 2중, 3중의 부담으로 다가올 전망이다.

슈뢰더 개혁에 대한 독일 국민의 심판은 우리의 피부에 더욱 와닿는다. 개혁의 지속이냐 성장이냐를 놓고 민의를 묻는 국민투표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슈뢰더 개혁은 사회민주주의의 틀 속에서 경쟁력을 확충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경직적 고용구조와 복지체제 속에 침체가 장기화하고 실업이 급증해 성장과 일자리창출을 위한 획기적인 전환 없이는 '독일병'은 거의 치유불능 상태다. 복지정책 축소로 좌파가 반발하고, 11%의 실업률에 민심이 등돌리면서 지지율이 급락해 지방선거에서 연이은 참패로 몰렸다. '독일판 대처'로 불리는 야당후보 앙겔라 메르켈이 당선될 경우 독일 경제는 친기업적이고 성장을 통한 고용창출 쪽으로 더욱 가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세계 2위, 3위의 경제대국들이 경제활성화에 승부수를 던지고 있는 것에 비하면 대한민국은 너무도 한가하다. 국민적 공감을 얻지 못하는 지역구도 극복에 대통령이 정치적 승부수를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역주의는 점차 완화되고 있으며 정치권이 부각시켜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다수다.

우리 경제는 성장잠재력이 약화되고, 투자와 기업가 의욕이 줄고, 성장엔진이 식고 있는 데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동북아 허브가 살 길이라고 하면서도 외국인 직접투자실적은 140개국 중 107위로 홍콩(2위), 싱가포르(6위)에 비교도 안 된다. 투자하기 좋은 나라로 만들겠다는 구호가 무색하다. 배고픈 것 해결보다는 국내의 '배 아픈 것' 시정에 열을 올려 분열과 갈등을 키워온 결과다.

전권을 걸고 국민에게 신임을 물어 '너 쉬어라' 하면 쉬는 것이 책임정치는 아니다. '대통령이 나라의 걱정거리'이고 외국에 나가 있으면 '나라가 조용해지는' 것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일 수는 없다. 고이즈미나 슈뢰더의 승부수는 후련하고 멋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보다도 자유경쟁체제를 확충하고 글로벌시대에 맞게 경제효율화에 박차를 가하려는 국민적 선택이 우리 입장에서는 더욱 부럽게 느껴진다.

변상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