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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속 해명은 더 큰 화를 부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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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김원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회룡
김회룡 기자 중앙일보 차장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김원배
경제부문 기자

23일 오전 11시30분 정부세종청사 기획재정부 기자실에선 예정에 없던 브리핑이 시작됐다. 정은보 기재부 차관보(1급)는 준비한 1쪽짜리 자료를 들고 와 읽기 시작했다. “정부는 군인연금과 사학연금 개편을 검토하지 않고 있다. 공무원연금 개혁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겠다.” 발표가 끝나자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대통령 공약에 언급된 것인데 이를 부인하는 것이냐?” “하긴 하는데 당장은 검토 안 한다는 뜻이냐?”

 그러나 정 차관보는 자료에 적힌 대로 “검토하고 있지 않다. 공무원연금에 집중한다”는 말만 반복했다. 전날 발표한 경제정책 방향 참고 자료에 사학연금(6월), 군인연금(10월) 개혁안 마련 일정이 들어간 경위를 묻자 “실무진이 논의하는 가운데 충분한 협의 없이 들어갔다”며 책임을 실무진에게 떠넘기는 듯한 모습마저 보였다.

 사학연금과 군인연금 개편안을 내년 6월과 10월에 마련한다는 방안은 정 차관보 설명대로 상황 파악을 못한 실무진의 실수이거나 정부의 희망 사항일 수 있다. 그러나 어설픈 해명은 나중에 더 큰 화를 부를 수 있다. 지난 2월 취임 1주년을 맞은 박근혜 대통령은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발표하면서 “공무원연금·군인연금·사학연금 등 3개 공적연금에 대해서는 내년에 재정 재계산을 실시해 개선 방안을 마련하고 관련법도 개정하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약속을 제때 이행하려면 미리 검토하고 준비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여당이 “정부 뒤치다꺼리에 우리만 골병든다”며 반발하자 정부는 확 꼬리를 내렸다. 이제 국민은 사학·군인연금 개혁은 안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23일 기재부가 해명을 하면서 이런 부분을 명쾌하게 설명하지 않은 건 두고두고 화근이 될 공산이 크다. 군인연금은 특수성이 있지만 공무원연금과 사학연금은 한 묶음이나 다름없다. 사립학교 교직원연금법 제42조엔 ‘연금 급여의 종류와 사유, 급여 제한 등의 사항은 공무원연금법을 따른다’고 명시돼 있다. 공무원연금법이 개정되면 사학연금을 수술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내년에 공무원연금법이 개정된 후 정부가 사학연금도 손보려 나서면 당장 “정부가 또 말을 바꾼다”는 비난이 쏟아질 게 뻔하다. 김태윤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정부가 정책을 발표할 때 신중하게 검토하지 못해 결과적으로 정책의 신뢰도를 크게 떨어뜨렸다”고 지적했다. 실무진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듯한 모습도 군색하기 짝이 없다. 여당과 제대로 조율을 하고 최종 발표자료를 챙기는 것은 기재부 고위 간부들의 몫이다. 졸속 해명이 나중에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대한항공 ‘땅콩 회항’ 사건을 보고도 모르나.

김원배 경제부문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