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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에세이] 시라크 대통령의 '권력무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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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파리=박경덕 특파원

프랑스 일간 리베라시옹은 5일자 1면에 만평을 실었다. 병원에 입원한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 있는 가운데 침대 옆에는 독수리로 묘사된 두 명의 정치인이 서로 노려보고 있는 그림이다. 두 사람은 도미니크 드 빌팽 총리와 니콜라 사르코지 내무장관이다. 그들이 독수리에 비유된 것은 시라크의 자리를 노리기 때문이다. 만평이 풍기는 것은 정치세계의 비정함이다. 대통령이 무력한 모습을 노출하자 곧바로 후계 싸움이 벌어지는 양상을 꼬집은 것이다.

드 빌팽은 그동안 차기 대선에 대한 관심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시라크 대통령이 2007년 대선에서 3선에 도전하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정이 달라졌다. 건강 때문에 시라크의 연임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자 드 빌팽과 사르코지의 대권 경쟁이 가열될 것으로 보인다.

시라크는 타고난 강골이었다. 72세인 그는 1978년 11월 26일 교통사고로 골반골절상을 입어 병원 신세를 진 이후 단 한 번도 입원한 적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 2일 오후 8시쯤 두통이 찾아왔다. 눈에도 이상이 생겼다. 그는 주치의를 데리고 파리의 발 드 그라스 군병원으로 갔다. 그리고 27년 만에 입원했다. 그날 시라크는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3선의 꿈을 버리기가 어려웠기 때문인지 모른다.

병원 측은 시라크가 경미한 혈관문제로 시력장애와 두통을 겪고 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일각에선 뇌동맥 파열 때 나타나는 초기 증세일 수도 있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그가 이번 주말 예정대로 퇴원하더라도 전처럼 전권을 행사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프랑스 언론들은 그의 입원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포스트 시라크 시대'가 전개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르 피가로는 "엄밀히 말하면 아무것도 변한 게 없지만 실제론 뭔가 변했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르 파리지앵은 "이미 모든 게 변했다"고 보도했다. 시라크가 지금 느끼는 것은 권력무상(無常)일지 모른다.

파리=박경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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