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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간 책 1900권 펴내 … 경북여고 전교생이 작가랍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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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대구 경북여고 1학년 7반 학생들이 지난 16일 교내 도서관에서 자신들이 쓴 책과 교정본을 들고 활짝 웃고 있다. 이 학교 1학년생은 올해 300여 권의 책을 펴냈다. [프리랜서 공정식]

“선생님, 이 책 예쁘지 않아요?”

“그래. 정말 애썼다. 나는 네가 포기할 줄 알았어.”

 지난 16일 오후 대구시 남산동 경북여고 도서관. 1학년 박지영(16)양이 지난주 출간된 자신의 책을 놓고 국어 담당 이주양(38·여) 교사와 얘기꽃을 피웠다. 박양이 쓴 책은 『한 줌의 흙』이란 제목의 60쪽짜리 동화집. 아무 쓸모없는 한 줌의 흙을 ‘나’로 내세운 뒤 이 흙이 사람들에게 유용한 그릇으로 변신하는 과정을 그렸다. 그는 “힘은 들었지만 책이 나온 걸 보니 뿌듯하다”며 활짝 웃었다.

 경북여고의 모든 학생들은 1학년을 마치기 전 어엿한 저자가 된다. 2010년 시작된 책 쓰기 전통은 올해도 어김없이 이어졌다. 올해 1학년생 437명이 펴낼 책은 모두 300여 권. 동화·소설 등 순수 창작물에서 우장춘·링컨 등의 위인전까지 다양하다. 대부분 혼자 쓰지만 두세 명의 합작품도 있다. 분량은 한 권당 60~120쪽. 이미 200여 명이 책을 펴냈고 다른 학생들도 원고의 마지막 교정을 보고 있다. 한 권당 1만~2만원인 출판비용은 학생들 각자의 용돈으로 충당한다. 학교 인근의 인쇄소가 흔쾌히 실비만 받고 제본해주고 있다.

 책에는 학생들의 땀이 배어 있다. 『최후의 재판』이란 법정소설을 쓴 윤성현(16)양은 여름방학 내내 재판정을 들락거렸다. 성폭행을 당한 아이의 엄마가 범인에게 보복하는 줄거리인 만큼 실제 법정 분위기를 느껴보기 위해서였다. 윤양은 “검사가 꿈이어서 법정소설을 쓰기로 했다”며 “취재 과정에서 법과 정의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전혜원(16)양은 뙤약볕에 서울 이화벽화마을과 대구 방천시장 등을 돌며 사진 에세이를 냈다.

 경북여고 1학년생들이 책 쓰기를 처음 시작한 것은 2010년. 교사들과 학생들이 머리를 맞대고 “학생 스스로 보람있게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를 고민하던 차에 글쓰기가 거론됐고 자연스레 책을 내자는 아이디어로 이어졌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짧은 문장에 익숙해진 학생들이 제대로 글을 써보게 하자는 얘기에 모두가 공감한 것이다. 관심 분야의 책을 쓰면 진로 모색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했다. 이름도 ‘꿈을 찾는 책 쓰기 프로젝트’로 정했다. 글쓰기는 매주 1시간씩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을 활용하기로 했다.

 우선 학생들은 무엇을 쓸지 고민해 가제목을 정했다. 이를 놓고 급우들과 수차례 토론을 거쳐 글의 뼈대를 구성했다. 현장 취재는 주로 여름방학을 이용했다. 이후 틈틈이 글을 써서 10월까지 1차 탈고를 마쳤다. 그러고는 친구 3명이 돌아가며 잘못된 문장과 오탈자를 찾아냈다. 마지막 교정은 5명의 지도교사가 맡았다. 사진과 그림도 각자 준비했다. 이렇게 5년간 만든 책이 1900여 권에 달한다.

 어려움도 적잖았다. 무엇보다 학부모들의 비판이 만만찮았다. “수능시험에 필요한 공부에 전념해야지 왜 쓸데없는 일을 시키느냐”는 항의가 끊이질 않았다. 학생들도 “그 어려운 일을 왜 하느냐”며 볼멘소리를 했다. 하지만 글쓰기와 진로 찾기에 도움이 된다는 걸 알게 되면서 태도가 바뀌었다. 『나는 누구게』라는 동화집을 펴낸 이수진(16)양은 “유치원 교사가 꿈이어서 동화를 썼다”며 “앞으로 아이들 눈높이에 맞는 선생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전양도 “늘 자신감이 부족했는데 이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학교 측은 겨울방학이 끝난 뒤인 내년 2월 초 12개 학급별로 조촐한 출판기념회를 열기로 했다. 장순자 교장은 “1학년생의 책 쓰기를 경북여고의 새로운 전통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대구=홍권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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