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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구] 샐러리맨 애환 함께 한 '형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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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나는 1979년 9월부터 4년 동안 럭키개발(현재의 LG건설)에서 근무하면서 한국의 직장문화를 다양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해외영업과 직원 7명 가운데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그때 우리는 수시로 밤샘을 해야 할 만큼 바쁘게 일했다. 중동건설 붐을 타고 공사계약 등의 업무가 폭주했기 때문이다.

한국문화에 낯선 데다 직장 초년병이어서 그랬는지 동료.상사와의 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특히 건설회사 분위기가 다소 거칠었는데 내 마음이 여렸기 때문이었는지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윗사람이나 선배가 결재 서류에 빨간펜으로 그으면서 나를 질책할 때 얼굴이 화끈거려 견디기 어려웠다.

어느 날엔 다른 부서 직원들이 우리 팀에 일을 떠넘기는 것을 참지 못해 너무 흥분한 나머지 눈물까지 흘리면서 내 책상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방식으로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해가 지면 동료들과 서울역 뒤편에 있었던 이른바 방석집을 찾아가 젓가락을 두드리고 노래를 부르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나는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모르는 미국인 행세를 하다가 갑자기 여자 종업원들에게 된장을 가리키면서 "이것, 내 엉덩이에서 나오는 것 아냐?"라고 익살을 떨었다. 대부분 나의 익살에 까무러쳤다.

한번은 전날 밤 마신 술이 깨지 않아 오전 10시쯤 회사 근처의 목욕탕을 몰래 갔다. 그런데 거기서 호랑이 같은 부장을 만나고 말았다.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었다. 그러나 부장도 겸연쩍었는지 환한 미소를 건네왔다. 우리는 목욕 후 함께 점심식사를 하면서 더욱 친해졌다.

이처럼 미국인인 내가 한국의 전형적인 샐러리맨처럼 생활할 때 정을 나눴던 친구가 있다. 김선용(金善用.55.(右)) 충정회계법인 상무(공인회계사)다. 당시 그는 해외영업과장이었고 나보다 나이가 네 살 많아 형님 같은 존재였다.

우리는 상사에게 함께 야단을 맞았을 때 함께 밖으로 나와 윗사람의 흉을 보면서 서로 깔깔대곤 했다. 무엇보다도 당시 金과장이 편안했던 것은 그의 다정다감한 성격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항상 미소 띤 얼굴로 내 등을 두드려주곤 했다. 그가 곁에 있으면 내 얼굴에서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그가 럭키개발 뉴욕지사장으로 근무했던 81년 나는 그의 가족과 함께 10일간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그 때 뉴욕 인근에 있는 호수를 찾았는데 얼음이 두껍게 얼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얼음 위에서 운전해보고 싶다"고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사색이 된 얼굴로 "난 살고 싶어! 아내랑 오래 같이 살고 싶어"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는 "남자 녀석이 깡다구가 없다"며 나를 차에 태워 호수로 들어갔다. 어찌나 겁이 났던지 식은땀까지 흘렸다.

그런 내 모습을 본 그의 아내는 "그리버는 아내를 끔찍히 사랑해 언제나 아내 생각"이라며 나를 치켜세웠고, 남편에게 "그리버 좀 닮으세요"라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그때 내가 기저귀를 갈아주곤 했던 그 집 딸 재민이는 벌써 대학 4학년생으로 훌쩍 자랐다. 金상무는 뉴욕에서 7년간 일하면서 미주리주에서 살고 계셨던 내 부모에게 수시로 전화해 나의 안부를 전해주기도 했다.

진짜 친구란 언제든지 부탁하면 이유를 따지지 않고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金상무는 언제든 나의 애로사항을 들어주고 도움을 주는 데 인색하지 않은 친구였다.

요즘 그는 나에게 "그리버! 나이가 네 살이나 많은데 나를 '헹님', '셍님'으로 불러야지"라고 농담을 건네며 웃곤 한다. 그가 내 곁에 오랫동안 있었으면 좋겠다.

정리=하재식,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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