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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미국인, 난민 아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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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휩쓸려 '미국의 모순'이 수면으로 떠오른 가운데 미국내 인종갈등에 따른 후폭풍이 거세게 불고있다. 카트리나를 피해 찾아간 뉴올리언스의 슈퍼돔에서 이재민들은 악몽에 직면해 지옥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 빈부격차에 따른 갈등이 현실화할 가능성도 높아졌다.

이런 가운데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최대 피해지인 뉴올리언스는 짧게는 9개월간 '유령 도시'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대다수 주민도 길게는 2년 동안 집잃은 노숙자로 떠돌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우리는 미국인 아니냐"=미국 흑인 지도자들은 4일 허리케인 카트리나 재난 지역에서 고투중인 흑인을 '난민들(refugees)'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인종차별이라고 비난했다.

흑인 인권운동가 제시 잭슨 목사는 이재민들은 '미국 시민(American citizens)으로 언론이 '난민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잭슨 목사는 흑인들의 상점 약탈 장면을 TV가 반복해서 방영하는 것도 비난하고 "흑인이 하면 약탈(looting)이 되고 백인이 하면 음식물을 찾는 행위가 되느냐"며 불만을 토로했다.

잭슨 목사는 이어 "이재민들은 미국 시민 이하의 처지로 내몰렸다"고 주장하고 "9.11 테러 당시의 경우 처럼 정부가 대규모로 돈을 풀어 구호사업을 펼쳐야 한다"고 요구했다.

전미흑인지위향상협회(NAACP) 블루스 고던 회장도 일부 흑인이 미국 시민으로써의 권리를 박탈당할 수도 있는 위기에 처해있다고 주장했다.

고든 회장은 이번 재난에서도 흑인이 더 많이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고 이재민들을 수용하고 있는 구호소의 사정도 형편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미시시피주 빌록시 등 흑인 밀집거주 지역들이 피해를 많이 받았으나 아예 관심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다면서 "적십자 표시와 미연방재난관리청(FEMA) 표시를 찾아볼 수 없다"고 분노했다.

그러나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이번 재난의 구호과정에서 제기된 일부의 흑인차별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고향 알라바마주를 방문한 라이스 장관은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고난을 받도록 방치했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며 흑인 차별 주장을 반박했다.

◇악몽 같은 슈퍼돔=BBC 보도에 따르면 피로와 허기에 지친 이재민들은 뉴올리언스를 상징하는 건물로 하나로 꼽혔던 슈퍼돔에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강간, 살인, 자살 등의 음산한 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의료팀이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아기가 태어나는 것을 돕고 있는 곳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인분이 보였으며 깨끗한 물도 부족했다.

1주일 만에 3명이 자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 와중에 경찰과 주방위군이 신원을 잘못 확인하고 무고한 사람을 사살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또 한 여성이 화장실에서 강간당하고 살해됐으며 강간범은 사람들에게 붙잡혀 맞아죽었다.

40세의 한 남자는 불과 몇 m 밖에 있는 시체를 나흘간이나 방치한 채 생활했는데 그가 취한 조치는 시체가 썩는 냄새를 피하기 위해 얼굴에 수건을 가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편 슈퍼돔에서 이재민들과 함께 생활한 AP 통신의 메어리 포스터 기자(여)는 슈퍼돔에 있는 동안 사람들의 대화, 기도, 고함 등 소음이 많았다고 기억했다.

슈퍼돔에 이재민들을 수용하기 시작한 시각부터 이재민들을 다른 지역으로 소개시키기 까지 계속 현장을 지킨 그는 처음에는 좀 불편하다는 기분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고통 그리고 공포를 느꼈다고 토로했다.

포스터 기자는 화장지가 없어 빳빳한 종이로 뒤처리를 하고 화장실이 고장나면서 악취가 진동하는 바람에 화장실에 가지 않기 위해 식사를 아예 하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고 전했다.

또 패싸움이 벌어지자 20여명의 주방위군이 공포탄을 쏘면서 질서유지에 나섰으나 그것마저 먹혀들지 않는 절박한 순간에 한 그룹의 여성이 성가를 부르면서 겨우 긴박한 상황을 모면하기도 했다고 포스터 기자는 보도했다.

◇"뉴올리언스 최소한 9개월 유령도시"= 재해복구 작업을 담당하는 미국 연방정부 관리들이 내년 여름까지는 도시 재건작업에 착수할 수도 없다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5일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 인터넷판에 따르면 연방 재난관리청(FEMA) 댄 크레이그 청장이 뉴올리언스를 휩쓴 홍수 물을 빼내는 데 최대 6개월이 걸릴 수 있고, 침수된 도시를 말리는 데 다시 3개월이 걸릴 수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도시 복구작업에 앞서 무너진 건물 잔해와 다른 위험한 물질들을 철거해야 하기 때문에 이재민들은 2년동안 집없이 헤매는 신세가 될 수있다고 크레이그 청장은 덧붙였다.

뉴올리언스의 이재민 수 만명은 카트리나 발생 후 닷새동안 식품, 물, 의약품, 법의 부재 속에서 고통을 겪었으며, 3일에야 비로소 이들에게 구호활동의 손길이 미치기 시작했다.

미 공병단의 로버트 플로우어스는 CBS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낙관적으로 잡아 하루 1피트 정도 물을 빼낼 수 있고, 도시 물을 다 빼내는 데 최소한 한 달은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배수작업은 예상보다 더 느리게 진행될 가능성이 높고, 본격적인 허리케인 시즌을 맞아 다른 폭풍우가 뉴올리언스를 덮친다면 배수작업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다고 관계자들은 우려했다.

뉴올리언스는 도시 대부분이 해수면보다 낮은 지역에 있기 때문에 물을 밖으로 퍼내야 하며, 기름,.화학물질.오폐수가 뒤섞여 배수작업에 더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플로우어스는 말했다. 공병단은 통신체계와 수송로의 붕괴로 복구작업이 늦어졌지만, 이제 도시의 수위가 안정됐으며, 제방 두 곳의 균열부위들을 복구하는 작업이 동시에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카트리나의 위협 속에서도 와이오밍 휴가지에 남아 있었다는 비판여론에 시달리고 있는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도 "카트리나로 폐허가 되다시피한 뉴올리언스가 예전같은 상황을 되찾는 데는 수개월에서 다시 수개월, 또 수개월이 지나 수년이 걸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디지털뉴스센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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