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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검은 성모와 할매 부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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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정영목
번역가·이화여대 통역번역
대학원 교수

바르셀로나에서 내륙을 향해 기차를 갈아타며 한참을 가면 톱니의 산이라는 뜻의 몬트세라트가 나온다. 케이블카 밑으로 점점 넓게 펼쳐지는 땅을 지켜보며 올라가다 고개를 돌리면 신들의 불거진 근육을 길게 떼어내 허공에 다닥다닥 붙여 놓은 듯 허옇고 거대한 바위산이 펼쳐진다. 가우디가 성 가족 성당의 모델로 삼았다는 산이다. 지난해 12월 24일 성탄 전날이었다.

 정상 근처에는 꽤 웅장한 수도원이 바위산에 안겨 있다. 굳이 이 높은 곳을 찾아온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카탈루냐의 수호자인 검은 성모를 만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별난 신심이야 있을까마는, 나그네 신세로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새 성당에서 1유로를 내고 초에 불을 붙이게 된다. 여차 하면 제 땅에서도 나그네가 되고 마는 흉흉한 세상이니 지푸라기라도 잡고 빌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는가. 특별한 날이라 긴 줄을 서겠거니 하고 찾아갔지만 의외로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중요한 순례지라는 건 옛말이고 이제는 유리로 보호하는 관광 명소가 되어 버렸나. 그래서 성모는 관광객들이 다른 일로 바쁜 성탄 전날에는 오히려 아들과 호젓한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일까.

 하지만 가까이서 바라본 검은 성모의 아름다움은 그런 것들을 아랑곳하지 않음에 있는 듯하다. 누구와 마주하든 늘 그 사람보다 몇 치 앞을 더 내다보고 한 길 더 깊은 곳을 들여다볼 듯한 얼굴. 실제로 이 성모상은 지혜의 보좌에 앉은 것이라 한다. 머리에 인 바위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그 엄정하고 서늘한 기운에 하소연을 하러 왔던 순례자도 도로 마음을 거두어 추스를 것 같다. 순례에서도 위로보다는 지혜와 힘을 구하는 것이 카탈루냐인의 기질이려나.

 경주 남산에는 고등학교 시절 교련복 차림으로 우울하게 며칠을 보냈던 화랑교육원 근처에 부처의 골짜기가 있다. 정겹기 짝이 없는 탑곡의 마애불들을 어루만지다 마지막으로 동쪽 기슭에 있는 이 골짜기의 주인을 찾아 터벅터벅 걸어간다. 올해 10월 3일 개천절이었다.

 몇 십 분을 올라가 대숲이 끝나는 곳이 오른쪽으로 열리면 아담한 크기의 바위 안에서 그 주인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주인이라기보다는 주인집에서 허드렛일이나 거들 것 같은 아낙네다. 이 부처 때문에 이 골짜기에 불곡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부처에게는 마애 여래좌상이라는 버젓한 직함도 있지만 아무리 봐도 할매 부처라는 별명이 훨씬 잘 어울린다.

 사실 할매 부처는 수많은 팬을 거느린 존재지만 미처 모르고 있다가 전날 산 너머에서 어느 스님의 해설을 귀동냥한 뒤 찾아 나서게 되었다. 스님 말에 따르면 마애불은 바위에 부처를 새긴 것이 아니라 이미 바위 안에 있던 부처를 드러낸 것이다. 이 할매 부처도 바위에 구멍을 파고 들어앉은 것이 아니라 원래 자기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이기에 그리 편안해 보인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얼굴은 수심에 잠긴 듯하다. 아니면 저 푸근한 얼굴에 감도는 것은 엷은 미소일까. 옆에는 자그마한 바위 둔덕이 있어 그곳에 올라 부처를 위에서 내려다볼 수도 있다. 할매 부처는 아래 위의 모든 시선을, 그렇게 쏟아지는 모든 마음을 다 받아들여 줄 듯하다. 위에서 볼 때면 남산에서 제일 늙은 이 부처가 얼핏 수줍은 동정녀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1미터 가까운 깊이의 바위 속 그늘에서 좀처럼 빛에 몸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다가 동지 때, 해가 가장 낮게 내려앉았을 때, 딱 한 번 그 빛을 온몸으로 받는다.

 며칠 뒤 동지가 오면 누군가 어떤 간절한 마음에 할매 부처의 몸에 해가 들어차는 순간을 기다리며 바위 둔덕을 어슬렁거릴지도 모르겠다. 그 며칠 뒤 성탄이 오면 어떤 나그네가 검은 성모를 만나 감히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굳게 마음을 다져먹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세상이 일 년에 한 번 크게 저무는 이 시기에 도시 한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은 멀리 있기에 오히려 두 여성에게 동시에 기원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이 다시 눈을 뜰 때는 부디 푸근한 공감의 지혜가 곳곳에서 전환의 계기를 만들어 내기를.

정영목 번역가·이화여대 통역번역 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