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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복거일의 보수이야기

다시 봄은 오고 삶은 이어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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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복거일
소설가

해는 짧고 날씨가 매서워서 산책 길이 한적하다. 그래도 동지가 다가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좀 따스해진다. 삶의 근원인 햇볕이 되살아나는 날이니, 동지보다 더 반가운 날이 없다. 아일랜드의 뉴그레인지 유적이나 영국의 스톤헨지 유적은 신석기 시대에 이미 사람들이 동지를 기렸음을 보여준다.

 5000년 동안에 돌도끼를 쓰던 문명이 컴퓨터가 보급된 문명으로 발전했다는 사실로 생각이 옮아간다. 정신이 어찔해질 만큼 빠른 발전이다. 삶의 역사에 비기면 5000년은 아주 짧은 시간대다. 현생 인류가 나온 것은 20만 년 전이고 인류가 나온 것은 대략 500만 년 전이며 지구에 처음 생명 현상이 나온 것은 4억 년 전이다.

 이처럼 경이로운 발전의 비밀은 문화의 진화가 끊임없이 가속된다는 사실이다. 문화가 진화하는 비율은 역사적으로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진화 과정이 작용하는 문화의 양은 끊임없이 늘어난다. 그래서 진화 과정은 점점 효율적이 되어 문화 수준이 가파르게 높아진다. 이런 과정은 복리로 늘어나는 예금과 같다. 처음엔 단리와 차이가 거의 없지만 오래되면 복리는 원금을 크게 불린다.

 그래서 지난 5000년 동안 문화는 직선적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유럽 문명이 해외로 진출하기 시작한 500년 전부터 문화가 갑자기 발전했고, 그 500년 안에서도 컴퓨터가 보급된 지난 50년 동안에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이런 가속은 앞으로는 더욱 가팔라질 것이다. 덕분에 인류는 생태계에선 도저히 나올 것 같지 않은 번성을 누린다. 개체 수가 늘어 이제 인구는 60억을 훌쩍 넘었다. 그런 개체마다 높은 수준의 문화를 누리니, 사람마다 비슷한 몸집의 개체들보다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를 쓴다. 식량의 부족과 질병의 창궐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서 태어난 개체들은 거의 다 살아남아 오래 삶을 즐긴다. 문화의 발전은 엄청난 지식과 경이적 기술을 낳았고, 이제는 지구 생태계에서 벗어나 ‘마지막 변경’인 외계로 첫발을 내디뎠다.

 이처럼 문화 발전이 가속되는 추세는 현대 사회를 가장 근본적 수준에서 규정한다. 당연히 우리는 모든 사회적 논점을 이 추세의 맥락에서 살펴야 한다.

 문화 발전은 필연적으로 큰 문제들을 낳았다. 생태계에서 인류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커 생태계 자체가 줄어들고 허약해졌다. 지구온난화는 인류 문명을 위협한다. 인공 지능의 발전은 ‘인간의 노후화’를 불러 단기적으로는 일자리 감소를 낳고 장기적으로는 인류의 자율성을 위협한다.

 이런 문제들은 모두 경이적 성공이 불러오는 것들이어서 대책을 내놓기 어렵다. 어떤 과업에서 실패하면 성공에 이르는 길이 조만간 나온다. 성공이 불러오는 2차 및 3차 효과들은 성공 자체를 훼손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대응해야 하므로 대응이 오히려 복잡하고 어렵다.

 지금 거의 모든 사회들에서 심각해진 소득 격차도 그런 맥락에서 살펴야 한다. 정보비용이 실질적으로 사라진 세상에선 성공적 혁신이 온 세계로 퍼진다. 덕분에 단숨에 거대한 부를 축적하는 사람이 많이 나온다. 마이크로소프트·오라클·구글·아마존·페이스북과 같은 선구적 미국 대기업들은 모두 가진 것이라곤 재능밖에 없는 젊은이들이 당대에 일구었다. 이제는 알리바바와 샤오미와 같은 중국 기업들이 그런 반열에 올랐다. 이런 기업들을 일군 젊은이들은 모두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냈고 사회에 큰 공헌을 했고 문화를 한 걸음 발전시켰다. 그들 때문에 가난해진 사람도 없다.

 ‘상위 1%’니 ‘세습적 자본주의’니 하는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현대 사회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없는 문제를 만들어낸 것이다. 문제는 가난이지 부의 축적이 아니다. 그리고 현대 사회는 가난에 아주 효과적으로 대응한다. 물론 부러움은 우리의 천성이므로 소득 격차가 자체로 문제라는 주장에 사람들은 이내 반응한다. 그러나 부러움이 정의감이나 도덕심으로 행세하는 것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울적하다. 사람마다 낯빛이 어둡고 어깨가 움츠러든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그래서 모험을 하기보다는 그저 안정된 일자리를 찾아 공무원이 되려는 젊은이만 많다. 다급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겐 한가로운 얘기로 들리겠지만 이런 상황도 인류 문화의 발전이라는 맥락 속에서 살펴야 한다. 우리 사회의 침체는 근본적 문제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원리로 삼은 우리 사회는 근본적으로 옳고 튼튼하다. 큰 문제들은 모두 그런 원리에서 벗어난 데서 나왔다.

 개인이든 사회든 안팎의 요인들 때문에 늘 흔들린다. 그런 흔들림과 근본적 문제를 변별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그래야 잘될 때 오만하지 않고 어려울 때 낙심하지 않을 수 있다

 동지 지나면 해가 길어지고 다시 봄은 온다. 그리고 우리 삶은 이어진다. 삶에 따르는 애환과 성패를 품은 채. 그것만큼은 확실하다.

복거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