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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를 흔든 시 한 줄

최불암 배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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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중략)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윤동주(1917~45) ‘자화상’ 중에서

이 시가 발표된 해는 1939년, 나라 뺏긴 설움에 젖은 시인은 우물을 들여다본다. 남자가 자신을 비추어본다는 건 꽤 큰일이라고 나는 생각해왔다. 거울을 들여다볼 때 저절로 반추되는 자신이 싫고 짜증나고 밉다. 이런 자아의 실체가 뭔가 싶어 남자의 자존감이 바스라진다. 윤 시인이 놀라운 건 이 시 한 편에 여러 겹 결을 고아놓은 것이다. 자연과 세월, 농경시대와 인간, 이제는 남의 땅이 된 조국 강산이 ‘자화상’에 켜켜로 들어앉아 있다.

 남자의 고백은 쉽지 않다는데 윤 시인은 스물두 살에 이미 한 세상을 보아버린 내면을 드러냈다. 어느 날인가, 이 시가 입 속에 고이더니 비감에 젖을 때마다 저절로 외우게 된다. 나도 세월 따라 가고 있구나, 싶으면서 이 시 속에 등장하는 사내가 나인 듯 동화된다. 아버지는 가슴에 응어리진 시를 많이 담고 있는 족속이다. 이 시의 뒷면에 문득 아버지의 등이 나타나면서 오버랩된다. 이 시 같은 모노드라마가 있다면 주인공을 하고 싶다. 최불암 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