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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9) 제79화 제79화 육사졸업생들(52) 장창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박정희전대통령은 한때 군을 떠났다가 6·25가 터진뒤 군에 복귀했다. 소령으로 육군정보국 1과장이 됐. 다시 들어온 탓으로 동기들보다 진급이 늦은편이었다. 50년9월에야 중령으로 진급했고, 11월 9사단 참모장으로 전보돼 중부전선에서 싸웠다. 51년4월 대령으로 진급, 5월에 육군정보학교장으로 갔다가 12월 육본 작전교육국 차장으로 옮겼다.
박정희대령온 부산피난시절 부산으로 피난온 육영수여사를 중매로 만나 육본이 대구로 이동한뒤 대구에서 결혼했다. 9사단 참모장으로 전선에 나간것은 신혼 닷새만이었다고 한다. 박대령이 육본 작전교육국 차장으로 간 얼마뒤 내가(당시 준장) 작전교육국장으로 발령받았다. 6개월 가량을 함께 일하게 됐다.
박대령은 2기생으로 사관학교에서 내가 가르치기는 했으나 기억에 남는 후보생은 아니었다. 체구도 작고 워낙 말이 없이 조용한 성품이라 얼른 눈에 뜨이지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만난 것이나 같았다.
작달막한 키에 가무잡잡한 얼굴, 근엄한 표정의 박대령은 그때도 역시 말이 없었다. 크게 웃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맡겨진 일만은 빈틈없이 해냈다. 글씨도 또박또박 단정했고 그 글씨만큼이나 몸가짐이 단정했던 것이 인상에 남았지만, 설마 나중 그가 혁명을 주도하고 대통령이 돼 18년간이나 우리나라를 통치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같이 일하며 얘기를 나눠보니 우리 사관학교에서는 내 제자였으나 일본육사로는 내 2기선배(박대통령은 만주군관학교에서 일본육사로 편입했다)였다. 나이도 여섯살이나 위였다. 단둘이 사석에서는 내가 선배예우를 해 말을 높여주곤 했었다.
나중 들은 얘기이나 박대통령은 위관시절부터 믿는 동기나 선·후배들에게 혁명의 의지를 엿보이곤 했다고한다.
「군사혁명」 논의는 자유당말기부터 군부 안의 젊은 하급장교들 사이에서 산발적으로 고개를 들고 있었다. 4·19로 잠시 주춤했다가 민주당정권의 무기력이 정치·사회의 무질서로 나타나자 논의는 행동화하게됐다.
사관학교 출신기중 가장 수가 많고 동기끼리 잘 뭉치고 그때 중령·대령으로 군의 허리노릇을 하고 있던 8기생들이 모의의 주축이었다. 「낫세르」 「네윈」등 신생후진국의 사례가 자극제였고 모델이었다. 8기에다 5기생중 일부가 가세, 모의가 무르익었는데 혁명의 리더로는 2기생인 박정희소장과 한신소장이 꼽혔다고 한다. 둘 다 청렴결백·강직한 군인으로 후배들의 존경을 받고 있던 것이 이유였다.
그중 여러가지 조건으로 박소장이 추대되고 리더가 확정됨에 따라 모의는 급진전, 5월16일 거사에 이른 것이다. 6·25가 끝난지 불과 8년, 민주당정권이 들어선지 8개월만의 일이다.
2기생 가운데 5·16에 주체로 참여한 사람은 리뎌 박소장말고는 한웅진장군(당시준장·소장예편)뿐이다. 한장군은 박소장이 대구에서 2군부사령관으로 있을때 이웃인 영천의 육군정보학교장으로 있으면서 자주 접촉, 거사가담을 권유받았다고 한다. 5·16당일엔 신동막소령(전국회의원)등 10명의 정보학교교육생을 데리고 올라와 박소장의 경호책임을 맡았다. 혁명성공후 최고위원에 뽑혀 공안위원장을 맡고 다시 군에 돌아가 3관구사령관·1군부사링관을 거쳐 소장으로 예편했다.
같은 2기생이면서 5·16당일 어쩌면 동기생 박소장을 체포할뻔 했던 사람이 ××사단장 이상국준장과 육군방첩대장 이철희준장이다. 서울외곽에 있는 이상국준장의 사단은 부사단장과 참모장이 모의에 가담, 당일 출동부대로 내정돼 있었다. 그런데 거사 몇시간전 불안을 느낀 두사람이 마음을 바꿔 이사단장에게 모의전모를 알렸다. 놀란 이사단장은 조선호텔 맞은 편에 있던 육군방첩대로 가 동기생인 이철희준장에게 이를 알렸고, 이철희준장은 장도영총장의 소재를 긴급수배(15일) 밤10시40분쯤 장총장이 방첩대본부에 나타나 사태진압에 나섰던 것이다.
이사단장은 장총장의 명에 따라 이날밤 4개소대를 시청앞에 출동시켰다. 「반란진압」을 위해 출동한 유일한 부대였다. 혁명군과 교전은 없었으나 나중 이것이 반혁명으로 몰렸다. 혁명3일후 예편, 혁명재판에서15년형을 선고받고 한동안 옥살이를 해야했다. 이준장은 54년 박대통령이 미고등군사반 유학때 함께 유학을 해 친밀했던 동기생이다.
박대통령은 나중 옥고를 치르고 나온 이준장에게 사업자금 1천만원을 보냈다고 한다.
육군방첩대장 이철희준장은 5·16모의를 사전에 파악하고 장총장에게 일당 체포를 건의하기까지 했으나 장총장이 우물쭈물하여 거사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는 나중 중앙정보부차장에 발탁됐다. 최근 부인 장영자와 엄청난 어음부도를 낸 그사람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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