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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8) 제79화 제79화 육사졸업생들(31) 장창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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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7면

해방후 우리국군이 창설되는 최초의 조치는 미군정이 45년11월13일 군정법령 28호로 국방사령부(Office of the Director of National Defence)를 설치하고 14일 「쉬크」준장이 초대국방부장에 취임한 일이었다.
부내에는 군사국을 두고 그밑에 육군과 해군의 2부를 두었다. 또 10월21일 발족한 경무국을 산하에 통합, 군사국과 함께 부장의 감독을 받도록 했다.
우리군의 모체가 되는 조직이 형성된 것이다. 1907년 일제에 의하여 대한제국군대가 강제 해산된 이후 실로 38년만의 일이다. 해산은 일제가, 재창설은 미국이 산파역을 맡게된것은 역사의 숙명이라고나 해야할지.
한국의 군창설을 앞두고 미국이 가장 애로로 느낀것은 「언어의 장벽」이었다.
「쉬크」 국방부장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특별언어학교를 설치해 「기초적인 군사영어를 해득하는 미군지휘관의 통역관을 양성」토록 했다.
이것이 바로 육사의 전신으로 치는 군사영어학교(Military Language School)다. 이름 그대로라면 군사언어학교지만 언어란 곧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었으므로 통상 군사영어학교로 번역돼 불리게됐다.
당시 군정당국이 건군작업을 도와줄 「군사경력이 있고 영어를 구사할수 있는 한국인」을 얼마나 목마르게 찾고있었는지는 원용덕장군의 발탁과정만 들어도 알수가 있다.
원장군은 만군의 군의관출신 중령으로 해방을 맞아 신경으로 갔다. 신경에서는 이미 정일권대위가 중심이 되어 교민자위단체로 동북대한민단보안사령부가 설치돼 있었다. 원중령이 나타나자 보안사는 그를 「총사령관」으로 추대하여 정일권사령관위에 앉혔다.
원중령은 만주의 사태가 악화되고 고국정세가 궁금해지자 몇몇 동지들과 함께 먼저 귀국했다. 그는 38선까지 오면서 일군에서 풀려나온 많은 청년을 규합·인솔하고 있었는데 38선을 넘자 미군들이 저지했다. 상부에 보고해야 한다면서 정지해 있으라는 것이었다.
원중령은 그 미군을 따라가 전화를 바꿔받고 직접 유창한 영어로 남하경위를 설명했다. 미군쪽에선 방역상 개성에서 하루만은 묵어가야 한다는것이었다. 전화를 받은 미군대위는 다음날 원중령에게 와서 『고급장교 출신으로 당신같이 영어를 잘하는 한국인은 처음 본다』면서 지금 군정청에서는 당신과 같은 사람을 찾고 있으니 서울에 도착하는대로 들러보라고 부탁했다.
귀경후 원장군이 군정청에 들러 별무국장 「아고」)(Reamer W. Argo)대령을 만나 영어로 트럭20대와 특별열차를 내주어 개성에서 수색까지 무사히 안착시켜준데 사의를 표하자「아고」대령은 『당신같은 영어실력자와 건군작업을 같이 하고 싶다』고 했다. 이래서 원 용덕중령은 일본군출신의 이응준대좌와 함께 건군의 산파역을 맡게됐다.
군사영어학교의 개교를 앞두고 군정청은 정원을 60명으로 하여 광복군 20명, 일본군 20명, 만주군 20명 3등분으로 할당. 각 군사단체에 장교및 준사관 출신자들의 추천을 부탁했다.
추천받은 사람들은 군정천 회의실에서 이응준·원용덕장군입회하에 「아고」 대령의 심사를 받았다. 응시자들이 직접 쓴 영·한문 이력서를 바탕으로 경력을 확인하고 간단한 영어회화 테스트를 하는 것이었다.
일군계와 만군계 출신 40명은 확보했으나 문제는 광복군계였다. 당시 광복군 국내지대장인 오광선장군이 광복군을 대변하고 있었는데 그는 중국에 있는 광복군 3개사단이 법통있는 광복군의 자격으로 입국할수 있도록 군정청과 교섭중에 있었다. 그는 광복군이 개선해서 건군의 핵심이 되어야하기 때문에 이에 앞서 군에 참여하는것은 친일파라고 간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군영에는 광복군계를 일체 추천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및 광복군 일부에서는 군정청의 태도로 보아 광복군의 입국은 기대할수 없다고 판단, 개별적으로 참여하는것이 현실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유해준(중국군대위· 국군소장·삼성중공업고문) 이성가(왕정위군소령·국군소장·대사역임·작고)장군등은 개별적으로 군영반에 들어갔다.
당시 군정청 경무부장으로 있던 조병옥선생도 군사경력있는 경찰간부들을 여러명 추천하여 입교가 허가됐다.
합격자 60명은 입교하기 전에 군정청 회의실에서 3일간의 예비교육을 받았다. 학교교사로 예정된 서울냉천동의 감리교신학교의 내부수리 때문이었다.
개교는 45년12월5일이었다. 개교식엔 주한미군사령관 「하지」중장과 조병옥경무부장도 나와 축사를 했다.
이듬해 2월27일 태능에 있는 제1연대의 서쪽 병사(현육사자리)에 옮겨 4월30일 폐교될때까지 약5개월동안에 군사영어학교는 건군의 주역들을 배출해 냈다.
애초 목적은 통역관을 양성한다는 것이었지만 모집대상을 과거 장교·준사관이상 경력을 가진 군사경험자로 제한, 곧 이은 국방경비대 창설에 이들은 속속 한국인 지휘관으로 발탁됐다. 실제론 군의 간부양성소인 셈이었다. 이것이 군영을 육사의 전신으로 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학생들은 영어실력에 따라 A·B·C·D 4개반으로 나누어 교육을 받았다. A반은 영어실력이 웬만큼 있는 사람, B·C는 기초가 있는 사람, D반은 기초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A반부터 순차로 임관하는 식이었으므로 입학식은 있었어도 졸업식은 없는학교였다.
교장은 미군「리스」(Rease)소령이고 만군중좌 출신의 원용덕장군이 한국인 보좌관으로 부교장 격이었다. 학생들은 통역관 신분으로 월9백원(나중 1천3백원)의 봉급도 지급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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