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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진보당 사건(42)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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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죽산은 정·부통령 선거에서 나타난 진보당 바람을 창당으로 몰고 갔다. 그는 장택상 등 보수우파 진영에도 합류를 교섭했다. 장택상은 이범석과 공화당을 함께 했으나 파쟁으로 이탈해 있었다. 죽산의 구상은 자유·민주 양당에 소속치 않은 재야 모든 정파의 연합이었다.
6월초 진보세력의 단합회의가 열렸다. 진보당의 조봉암 서상일, 33인의 한사람인 이명룡, 유도회장 김창숙, 전 기독교연합회장 박용의, 전 근로인민당부위원장 장건상씨 등이 진보세력의 단결을 촉구하는 성명을 냈다.

<줄다리기로 시종>
목표는 정화암·조헌식·김성숙 등 세 계열에다 무소속 국회의원까지를 진보당에 합류시키는 것.
이 성명을 계기로 시작된 통합 운동에서 쟁점은 조봉암을 당의 지도적 위치에 올릴 것인가의 문제였다. 죽산은 혁신원로층이 염려하는 것, 즉 「공산당 경력 때문에 모략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2선에서 활동하겠다고 성명했다.
이리하여 창당준비는 혁신 각파 외에 이범석의 공화당 계열까지도 연합회의에 참여했다. 민주혁신운동으로 이름지어진 대 단합의 모색이었다.
그러나 5개 이상의 정파통합은 쉽지 않았다. 혁신계의 원로들-그들은 지사이기는 했지만 현실감각엔 어두우면서도 고집스런 노인들이었다. 6월부터 10월까지 창당작업은 파벌의 줄다리기로 시종했다. 그들은 진보당 강령까지도 손질하는 백지에서의 출발을 내세웠다.
이 단계에서 죽산계열은 통합대열을 떠나 진보당 창당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여기에 반발해 서상일·이동영·최맹환·고정동 등 진보당 창당 준비위의 중앙상무위원 23명은 진보당을 떠났다. 이리하여 혁신통합은 실패하고 진보당 운동과 민주혁신당 운동으로 분열했다.
죽산 계열은 11월10일 시공관에서 창당대회를 열고 진보당을 창당했다. 위원장 조봉암, 부위원장 박기출·김달호로 짜여진 죽산계 일색의 당 지도부로서였다.

<지구당 결당 방해>
조봉암과 갈라선 서상일계열은 장건상 계열과 함께 창당에 나섰지만 역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서 계열만의 민주혁신당을 창당했다. 그 밖의 혁신계열은 정당에 참여치 않은 채 재야 그룹으로 남았다.
진보당은 출발 때부터 가시밭길이 예고되었다. 진보당을 좌경집단으로 몰아붙이는 보수우파진영의 경계와 박해가 점점 좁혀 들었다.
조직부차장이던 전세룡씨의 회고.
『진보당은 창당 때부터 방해와 박해를 받았다. 우리가 사무실을 계약하자, 당국이 건물주에게 압력을 가해 해약시켰다. 이 때문에 네 번째 계약에서 간신히 종로통의 장안빌딩에 사무실을 얻었다. 도당이나 지방의 지구당 결당대회도 예외 없이 외부세력의 방해를 받았다. 서울시당 결당대회 때는 자유당의 전위 폭력세력이던 유지광파 청년들이 난입해 용공분자는 쳐부숴야 한다면서 깡통·계란·사과 등을 던져 수라장을 만들고 난투극을 벌였다.
전북의 한 지구당 결당 대회에 내려갔을 때는 정체불명의 청년들이 한밤중에 우리들이 들어있는 여관의 전기를 끊고 습격해 들어와 몽둥이를 휘둘렀는데 이 사건으로 한 명의 지구당원이 숨지기도 했다.
현재 혁신정당을 이끌고있는 K씨는 이 같은 박해가 닥친 것을 미리 알았던지 <진보당이 살아 남을 수 있겠는가>란 성명을 남기고 창당 전에 탈퇴했다.』
재정 간사였던 조규택씨의 회고.
『진보당은 창당 후 6개월만에 정당등록증을 받았다. 처음엔 서류미비란 이유로 반송하고 그 다음엔 정강정책의 합법성을 검토한다는 등의 구실로 등록을 지연시켰다.』
진보당이 내건 이른바 「자본주의 지양」 「평화통일」 등은 휴전 3년 후의 정치기류 속에선 불투명한 회색빛깔로 비쳐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보당의 간부진은 과거 경력에서 보면 우파 색깔이 강했다.
박기출·김달호 두 부위원장은 우파활동의 경력자들. 간사장 윤길중씨 역시 8·15후 상해임정의 건국준비사업으로 신익희가 개설한 행정연구반에 참여했고 제창 때는 전문위원, 2대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죽산계열이 되기 전까지엔 신익희의 측근이었다. 그 밖의 간부들, 예를 들어 최희규 당무부장과 그 그룹은 반공이란 면에선 극우파들.
조직부의 핵심이던 전세룡·안경득씨 등도 8·15후 북의 공산당에 쫓겨 남하한 반공주의자들이었다.
8·15이후 보수우파와 달리 김구·김규식 계열로서 남북협상 길에 참여했던 사람은 재정위원장 신창균, 통일문제연구위원장 김기철씨 등 몇 사람. 그러나 이들 역시 반공을 신념으로 했고 죽산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확신을 갖고 진보당에 참여했다고 했다.
▲신창균씨=나는 한독당의 재정부장이었다. 48년엔가 한독당에선 죽산에게 선전부장을 맡아주도록 교섭한 일이 있다. 죽산이 공산당이었다면 김구 선생이 입당교섭올 해보라고 했겠는가. 한독당의 기본노선은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내건 삼균주의다. 진보당 노선은 한독당의 민족주의와 삼균주의를 계승했다는 확신을 가지고 김정철과 함께 참여했다.
▲조규희 선전위원장=나는 8·15이후 안재홍 선생이 운영한 한성일보 정치부를 책임 맡고 있었다. 김규식 선생의 민족 자주연맹이 추천한 집회에서 처음 죽산을 만났다. 죽산은 내게 박헌영에 보낸 공개장 파동 때 한성일보는 내가 말하지 않은 것까지도 만들어 쓰더라고 했다.
그래서 잘못된 것이 많으냐고 했더니 <소련에 대한 맹종, 당내 섹트주의 등 공산당 노선이 민족에 이익이 되지 못한다는 내 입장을 잘 반영해 주었다>고 했다. 그로부터 죽산과 가깝게 지내면서 그의 인품에 끌려 당도 함께 하게 됐다.
아뭏든 진보당 안에선 청년단 출신이나 특무기관 출신이 너무 많다는 불평이 나올 정도로 조직은 우파색이 강했다. 그랬지만 그 무렵에 혁신은 이단시된 것일까. <진보당을 특별 사찰하라>는 김종원 치안국장이 전국 경찰국장에게 보낸 특별지시는 진보당에 대한 당국의 경계의 눈길을 대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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