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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신의를 지키며…」-이란사태 팔레비의 시련(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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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우리는 이란의 국내문제에 간섭할 의사도, 능력도, 욕심도 없습니다.

<1979년1월17일 기자회견>
백악관 남쪽잔디밭에 서서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2백여명의 기자들의 볼에도 눈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멀리서 희미하게나마 확실히 군중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최루탄을 터뜨린 기마 경찰관들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운 나쁘게도 바람은 이란지도자를 환영하기 위해 모인 우리들 쪽으로 불어 최루가스가 우리 모두를 감싸고 말았다. 그러나 모든 텔레비전의 카메라가「샤」를 환영하는 나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으므로 나는 눈이 따가운 것도 참으며 태연한 체 해야만 했다.
「샤」와「파라」왕비는 매우 당황했다. 자신들 때문에 이란 학생들의 데모가 일어났다 하여「로절린」과 나에게 여러 차례 사과했다. 우리들은 사태가 진정된 것 같으며 아무런 피해도 없다고 그들을 안심시켰다.
1977년11월15일-그 날의 일은 하나의 전조였다. 그 날 최루탄은 일시적 고통을 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거의 2년 후, 그리고 그 뒤의 14개월 동안 미국은 이란 때문에 진정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삼엄했던 「샤」방미>
이란의 통치자인「모하메드·레자·샤·팔레비」는 국내의 정치적 반대를 거의 용인하지 않았다. 그의 비밀경찰인 사바크가 이란시민들을 잔혹하게 다루고 있다는 주장이 미국에 계속 들려왔다. 워싱턴에서는「샤」에 반대하는 군중시위가 일어났다.「샤」의 방미 일정이 가까워짐에 따라 국왕보호를 위한 비상예방조치들이 취해졌다. 백악관에 들어오는 모든 인사들은 면밀한 보안점검을 받았고 시위자들을 환영군중과 안전거리에 두라는 지시가 워싱턴경찰에 하달되었다.
간략한 환영식을 끝낸 뒤 우리는 백악관 안으로 들어갔다.「샤」는 나에게 미국 건국2백주년을 축하하는 선물을 주었다. 그것은「조지·워싱턴」의 훌륭한 초상화가 새겨진 융단벽걸이였다.
이어 우리는 각료회의실에서 공식회담을 시작했다.「샤」는 호감이 가는 인물이었다. 몸의 자세가 꼿꼿하면서도 거만해 보이지는 않았고 최루가스사건이 있었는데도 침착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으며 행동은 놀랄 만큼 정중했다.「샤」와 나와의 첫 대면 분위기가 서먹서먹했던 것은 그가 미국대통령들과 친숙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곤 할 수 없다.
l943년 테헤란에서「프랭클린·루스벨트」대통령과 만난 이래「샤」는 백악관을 자주 방문했었다. 나는 그가 만난 8번째의 미국 대통령이었다.
나는 내 전임의 일곱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샤」의 이란을 강력한 동맹국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이란이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아랍국가들의 금륜 조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스라엘에 원유공급을 하고 있는데 대해「샤」에게 감사했다.
77년 11월「샤」가 워싱턴에 왔을 때 나는「사다트」이집트대통령의 극적인 예루살렘 방문계획에 대한 그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각별한 신경을 썼다.

<〃인권〃거론 미리 연습>
두 번째 공식회담을 끝낸 뒤「샤」와나는 대통령 집무실 옆의 한 작은 방에서 단둘이 마주 앉았다.나는 그가 모욕감을 느끼거나 지나치게 당황하지 않도록 내가 할말을 미리 연습까지 했었다.
『본인은 국왕이 이룩한 위대한 업적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이렇게 운을 뗀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몇 가지 문제점도 없지 않더군요. 국왕께서는 인권문제에 관해 본인이 그동안 해온 말들을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란에서는 인권이 존중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는 귀국의 시민들이 늘고있습니다. 국제사회에서의 이란의 명성은 그런 사람들의 불평 때문에 손상을 받고있습니다.
반대세력들과 보다 밀접한 대화를 갖고 또 엄격한 통제정책을 다소나마 완화함으로써,.이 문제를 풀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
「샤」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그렇지 않습니다.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습니다. 본인은 이란을 공산주의로부터 지키기 위해 법을 집행해야 합니다. 이 문제는 이란뿐만 아니라 페르시아만 지역과 서방세계의 국가들에도 위협이 되고있습니다. 불만이나 최근의 소요사태는 조국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국법에 저항하는 말썽꾸러기들이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으며 대다수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관심표명이「샤」의 정책을 변경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러나 인권문제에 관한 의견교환은 그를 당황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이후 그와 내가 인권문제는 물론 다른 조심스런 문제들에 관해 서로 얘기를 수월하게 나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978년에「팔레비」국왕은 이란국민들의 요구에 부응하려 했으나 질서와 화합이 회복되기는커녕 그의 머뭇거리는 태도로 불만은 고조되고 회교단체들과 경찰의 충돌이. 여기 저기서 빚어졌다.
그런데도 당시 미 중앙정보국(CIA)의 보고는 사태를 심각하게 평가하지 않고 있었다. 그해 8윌 CIA의 한보고서는『사태가 혁명적이기는커녕 혁명이전상황도 아니다』고 평가했다.
이란의 소요는 날로 격렬해져갔고 나는 사태에 계속 관심을 기울이고있었다.
9윌7일「샤」는 이란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뒤이어 경찰과 회교군중사이에 유혈충돌이 벌어졌다.수백명의 시위자가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 후 시위군중의 세력은 커졌고 그들은「팔레비」의 퇴위를 요구했다. 그럴수록「샤」의 억압수단도 더욱 가혹했다.
때때로「샤」는 반대세력을 달래려고 했다. 그는 수백 명의 반대세력지도자들을 사면했다.

<「호메이니」등 사면>
이 사면인사 중에는 회교지도자「아야틀라·호메이니」옹도 포함돼 있었는데 그는 그 무렵 이라크에서 파리로 망명 지를 옮겼었다.「샤」는 또 회교지도자들의 압력 때문에 이스라엘과의 제반 관계를 단절하기 시작했다. 다만 원유공급은 그대로 지속시켰다. 그런데도 난제는 가중되어 갔다, 유전시설에서 심각한 파업이 일어나 .원유생산량은 하루 6백만 배럴에서 2백만 배럴 이하로 격감됐다.
나는「샤」가 직면한 사태의 심각성을 지적한 보고서를 이란의 미국대사관으로부터 끊임없이 받았다. 그러나「월리엄·설리번」주 이란대사는 나나 내 보좌관들과 마찬가지로 이란의 안정을 위해서는「팔레비」가 미국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믿고있었다.1978년10월28일 「설리반」대사는 워싱턴에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팔레비」는 한편으로 군부를 통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과도기를 잘 이끌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나는「호메이니」 에게 어떤 협상제의를 하는 것도 강력히 반대한다.』<무단전재·출판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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