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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60)-제79화 육사졸업생들 (1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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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원래 조선인은 만주군에서는 장교가 될 수 없었다. 장교 자격 규정을 일계·몽계·만계(만주거주중국인)로 명문화해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1936년 홍은익장군이 관동군사령부에 전속와서 만주국 군사부(국방부) 교육고문을 겸직하게 되었을 때 규정을 고쳐 우선 현역으로 들어와 있던 한인 사병들에게 장교가 될 수 있는 길을 터주고 이듬해부터는 무관학교 모집대상에 선계를 포함시켜 모집공고를 내게했다.
이래서 1차로 김응조준장(전북도경국장으로 있다가 6·25 때 특임, 중령임관·국회의원 역임)과 계인주대령이 사병에서 봉천무관학교 4기로 입교했고 1937년부터는 중학교를 나온 한인청년들이 대거 응시하여 봉천5기에는 18명이 들어 갔다.
육군의 정일권·백선엽·김일환·박태원 (6기·사격연맹부회장)·문용채(군영작고)·윤춘근(2기·작고)·최경만(2기·동서석유고문)·김용기 (7특·진해화학고문)장군과 해병대사령관을 지낸 김석범중장(서해장학회이사장)과 신현준중장(도미)등이 바로 봉천5기들이다.
홍사익장군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은 그의 영향력도 작용했지만 그 동안 한인들이 국경경비대나 철도경비대 같은 경찰부대에서 군사적인 재질을 발휘할 수 있었고 국공합작(1936년) 후 만주국에 대한 중앙군 (국부·중공연합군)의 저항이 활발해졌다는 시대적 상황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당시는 일제가 중일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때인만큼 만주군의 증강이 절실했던 것이다.
그후 징병령이 내려지는 반면 장교가 되는 길이 개방되자 많은 한인청년들이 계속 군대에 들어갔다.
이같은 상황속에서 일본은 l939년 조선인들로 간도특설대라는 특수부대를 만들었다. 이것은 보병·기갑 혼성전투부대로서 당초엔 3백60명으로 발족됐으나 나중엔 8백명 가까이로 늘어나게 된 「증강된 대대규모」였다.
부대장은 일본인 장교였으나 중대장의 반수는 조선인이었고 소대장 이하하사관·사병은 모두 한인이었다.
일제는 이 조선인 부대 외에도 백계러시아인들로 구성된 천야부대, 몽고인들로 편성된 기야부대, 오르치온족 공작대 등 소수민족의 부대들도 같은 목적, 같은 형태로 창설했다.
특히 회교부대도 만들었는데 그것은 화교도들이 교리상 돼지고기를 안 먹어 돼지고기를 많이 먹게 되는 중국인·만주인들과 한부대에 편입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들 소수민족들의 특수부대 가운데서 조선인부대가 가장 강력했고 유명했다. 일본군· 만주군이 못해내는 작전을 간도특설대가 가서는 거뜬히 해치우곤 했던 것이다. 특설대는 전투도 잘했지만 선무공작에도 능해 지방민들의 환심을 샀다. 작전때 무자비하고 잔학한 일본군과는 극히 대조적이었다고 한다.
조선인의 공적평가에 인색한 일본인들도 간도특설대에 대해서는「상승의 조선인부대」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어느 일본인은 그의 저서에서『간도특설대 요원들은 사기가 높고 군기가 엄정하며 책임감도 강하다. 잠에 못이겨 졸았던 블침번은 다음날 자살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 부대의 한국인 장교로는 김석범중장(봉천5기·일본륙사 59기·만군대위)이 부대장격으로 최선임이었다.
그밖에 김백일중장(군영·만군대위·전사)이 중대장을 했고 임충남전국방장관과 이룡 전강원지사·이동화(2기) 전 철도청장 및 해병대사령관을 지낸 김대식·신현준중장·박명암 (특임·자유사대표) 전 혁검부장·이백일의원·백선엽·송석하·최경만·윤춘근장군 등도 소대장 또는 중대장을 거친 특설대출신들이다.
만주군·관동군 안에서 벌어지는 총검술·격투기·사격 등 무술대회에서는 특설대가 주로 우승기를 차지했다.
특설대는 만주의 5족 (한·일·중·만·몽)들 사이에서 경쟁하며 살고있는 우리 동포들에겐 큰 긍지와 희망을 안겨주었다. 각 교민단체에서는 부대가 이동할 때마다 각종 연예단을 보내 위문했고 뜻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부대가 쌓은 전투경험과 군사지식이 조국독립에도 큰 힘이 될 것으로 기대했었다.
만주군의 한인 장교·사변 중 8·15후 남한으로 귀국한 사람은 1백20명쯤 되는데 대부분이 국군의 장교가 됐고 그중 41명은 장성으로 진급됐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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