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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진보당사건(37)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피난수도 부산을 먹칠했던 52년의 정치파동에서 죽산은 국회부의장으로서 대립의 조정자였다. 대통령의 직선제 개헌을 놓고 정부와 국회가 대립해 많은 야당의원들이 국제공산당 관련 혐의로 체포되었을 때 죽산이 건재했던 것은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당시 죽산도 야당연합의 편에 섰다 .그랬지만 그는 장면씨나 민국당과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파국으로 내몰리고 있던 정치파동을 수습하는 길은 정부제안의 대통령 직선제와 야당의 내각제를 절충하는 발췌개헌안 처리였다. 이 때 죽산은 장택상총리와 함께 수습의 주역을 맡았다.
당시 국회의원이던 윤길중씨의 회고「개헌 뒷수습 도와 『죽산은 처음엔 이대통령과 가까왔다. 재헌국회 때 나는 대각책임제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때 죽산은 대통령중심제라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친일파의 집단인 한민당보다는 이박사가 훨씬 애국자라고 했다. 부산피난 때도 이대통령은 수시로 죽산에게 국회문제를 당부하곤 했다. 내가 죽산의 편지를 대통령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그러던 죽산이 이박사와 벌어진 것은 정부가 야당탄압을 하면서부터였다. <이대통령은 반민주적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행정능력도 믿을 수 없다. 대외문제 등 큰 것만 이박사가 처리하고 내정은 내각에 맡기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죽산은 이런 생각에서 내각책임제를 내세우는 야당연합에 참여했다. 그랬는데 나중엔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의원들을 설득했다.
나는 여기에 따를 수 없다고 했다. 그랬더니 죽산은<국내 정치혼란이 수습되지 않으면 유엔군이 개업을 선포해 권력을 장악하겠다는 비밀각보를 보내왔다. 이대통령의 고집을 꺾을 수 없으니 달리 길이 없지 않으냐>고 했다.』
결국 발췌개헌안이 통과돼 정치파동은 야당의 굴복으로 수습됐다.
대통령선거가 공고되자 죽산은 대통령에 입후보해 이박사와 경쟁했다.
다시 윤길중씨의 희고.
『2대 대통령선거는 대통령임기만료가 닥쳐 운동기간이 17일밖에 없었다. 이박사와 경쟁해서 이길 가망은 누구에게도 없었다. 그랬지만 경쟁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들의 생각이었다. 우리는 처음 신택희씨 더러 입후보하라고 했다. 그런데 못하겠다고 했다.

<조병옥이 맹공격>
그래서 죽산과 함께 동래로 이시영씨를 찾아가 출마를 권했는데 역시 사양했다. 그래서 죽산이 나서기로 했다. <이대통령의 애국정열, 혁명경력, 건국의 공로는 존경한다. 그렇지만 행정책임자로는 적당치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실망을 대변하기 위해 대통령후보에 나서기로 했다>는 것이 죽산의 출마의 변이었다. 나는 죽산에게 출마를 권했던 책임때문에 선거사무장을 맡았고, 그것이 그이후 죽산과 정치행로를 같이하는 계기가 됐다.
대통령후보 조봉암은 협공에 몰렸다. 이시영씨가 민국당의 권유를 받아들여 출마했기 때문이다. 당시 조봉암후보는 벽보조차 붙이지 못했다. 경찰은 벽보를 가지고 나간 운동원을 유치장에 가두어버렸다. 민국당 쪽에서도 죽산을 공격했다. 이시영후보의 러닝메이트였던 민국당의 조병옥 부통령후보가 공격의 선봉장이었다.
『우리는 공산주의와 투쟁했고 공산화할 우려가 없다는 데서 자유진영의 신임을 받고 있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로서 전향하였을 뿐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증명할만한 아무런 태도표명도 하지 않고 있는 조봉암씨가 집권을 꿈꾸고 대통령에 입후보했다. 민족진영의 일시적인 분열을 틈타 반리승만정책을 구실로 근로층의 좌경화를 기대하려는 그런 행동은 참을 수 없다.
만약 조씨가 입후보를 철회치 않고 또 그를 국민다수가 지지하는 경향이 보인다면, 일시 헌법을 유린한 과오는 있을지라도 이승만박사에게 표가 집중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조씨는 이번 국회에서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지지해 다스 인기를 얻고 있으나 제헌국회 때는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선두에 서서 반대한 기회주의자다. 만약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내각책임제 개헌은 되지 않을 뿐아니라 국가는 사상적으로 자유 우방의 신임을 받지못하는 중대 위기에 봉착할 것이다.
조봉암씨에게 대통령의 자리를 맡길 것이라면 차라리 김일성과 타협했을 것이다. 죽산의 과거를 문제삼은 극단적 공세였다.
선거결과는 이대통령이 다른 후보보다 4백만표를 앞선 일방적 승리였다. 그러나 조봉암후보는 이시연후보보다 20만표가 많은 80만표선을 얻어 2위를 기록, 보수우파 진영에 패배와 충격을 안겨주었다.
대통령선거 2위 득표는 죽산에게는 장래의 가능성이 되었고 보수우파엔 현실적 위협이 되었던 모양이다. 이로부터 죽산은 공산당 경력과「혁신」이란 딱지가 불신의 표적이 되었다.
최초로 그에게 다가섰다가 사라진 위기는 소위 동해안반란음모사건.
강원도 속초지구에 주둔해 있던 1군단에 대통령이 시찰오게 되면 군단 인사참모인 김화산대령이 대통령을 저격하고 일부 병력으로 곧바로 임시수도 부산에 진격한다. 부산에선 육본의 정보국장 김종평준장이 이들을 지휘, 임시경무대를 접수하고 조봉암국회부의장을 대통령으로 추대한다는 것.
이 사건은 김종평준강이 1군단에 들렀을 때 이형근군단장 등 1군단 고위장교들과 술을 마시면서 부산정치파동 때의 군의 정치개입을 개탄했다는 것. 그 후 우연히 죽산이 속초에 왔다가 l군단의 고급장교들의 접대를 받았다는 사실을 꼬투리로 했었다. 그러나 군법회의에서 사건이 과장되고 조작된 것으로 나타나 죽산은 화를 면했다.
그 이후 국제공산당사건, 김성주사건 등 정치색 짙은 사건이 날 매마다 죽산의 관련설이 떠돌았고 죽산은 수사의 최종과녁이었지만 그 때마다 구실을 주지않아 화를 면했다. 그만큼 죽산은 정치음모를 비켜나기 위한 조심성을 유지했다. 그래서 장택상씨 같은 이는 이런 사태를 풍자해 죽산에게<벼룩에 굴레를 씌워 수레를 끌게 했으면 했지 제놈들이 조봉암에게 올가미를 씌울 수 있나> 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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