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게임 원작 영화의 성공 비결] 팬심을 훔치거나, 매니어가 되거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할리우드는 이야기의 용광로다. 연극·소설·만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원작의 이야기를 끌어와 영화로 녹여낸다. 한데 유독 비디오 게임 원작 영화들은 타율이 낮다. 대개 열광적인 인기를 모은 게임을 원작으로 삼았음에도 성공보다 실패 사례가 잦았다. 물론 실패의 경험도 쌓이면 달라진다. 원작의 캐릭터나 설정을 빌려오는 것을 넘어 게임의 특성과 팬들의 취향을 충실하게 반영하는 시도가 늘어가는 건 반가운 일이다. 그 성공과 실패의 역사를 게임 원작 영화를 위한 다섯 가지 제안으로 짚어본다.

‘슈퍼 마리오’(1993, 록키 모튼·아나벨 얀켈 감독)는 게임을 실사로 옮긴 첫 번째 영화다. 원작 ‘슈퍼 마리오’ 시리즈는 역대 가장 많이 팔린 인기 게임으로 꼽힌다. 일본 닌텐도에서 1985년 출시된 이래 전 세계에서 2억6200만 장 이상이 팔렸다. 다양한 적과 함정을 피하면서 시간 내에 목표 지점에 도착하는 경쾌한 게임이다. 하지만 영화는 전혀 달랐다. 원작에서 주인공인 배관공 형제 마리오와 루이지의 캐릭터만 빌려왔을 뿐, 누아르 같은 어두운 분위기와 인간형으로 진화한 공룡 악당의 출현 등 황당한 설정으로 관객의 외면을 받았다. 이후로도 ‘스트리트 파이터’(1994, 스티븐 E 드 수자 감독) ‘윙 커맨더’(1999, 크리스 로버츠 감독) 등 여러 게임 원작 영화의 실패가 이어졌다.

성공 사례를 꼽기 위해서는 ‘툼 레이더’(2001, 사이먼 웨스트 감독)의 등장을 기다려야 했다. 원작 게임의 캐릭터가 지닌 매력을 제대로 살려 영화화에 성공했다. 주연을 맡은 안젤리나 졸리는 쌍권총으로 무장한 섹시한 여성 탐험가 라라를 맞춤하게 소화했다. 모험 요소가 두드러졌던 원작 게임에 비해 영화는 액션에 더 치중했지만, 흥행에는 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영화는 1억1500만 달러의 제작비로 전 세계에서 2억7470만 달러를 거둬들였고, 안젤리나 졸리 역시 액션 스타로 세계적인 스타덤에 올랐다.

1. 매력 요소를 확실히 짚어라

그렇다고 캐릭터의 매력이 전부라는 얘기는 아니다. ‘스트리트 파이터 : 춘리의 전설’(2009, 안드레이 바르코비악 감독)은 1980년대 후반, 뜨거운 인기를 누린 격투 게임의 여성 캐릭터 춘리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캐릭터 이름과 기본적 대립 구도 외에는 원작 게임의 영향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영화였다. 비약적인 전개와 단조로운 액션은 게임 팬이 아닌 관객에게도 실망을 안겼다. 반면 ‘사일런트 힐’(2009, 크리스토프 갱스 감독)은 주인공을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꿨지만, 원작 게임의 세계관과 스토리에 충실해 호평을 받았다. 현실과 지옥이 교차하는 마을을 배경으로 끔찍한 괴물들과 사투를 벌이는 원작 공포 게임의 괴기스런 분위기를 제대로 살렸다. ‘맥스페인’(2008, 존 무어 감독)은 그 반대였다. 3인칭 슈팅 게임의 걸작으로 불리는 원작 게임의 음울한 분위기를 간과했다. 여타 밋밋한 액션영화와 별반 다르지 않은 전개가 게임 팬들의 질타를 받았다. 흥행 성적도 좋을 리 없었다.

관건은 게임의 매력 포인트를 확실하게 짚어내는 것이다. 잘 짜여진 스토리와 세계관을 갖춘 게임이 있는가 하면, 주인공 캐릭터의 개성이 두드러지는 게임이 있다. 대중문화평론가인 김봉석 에이코믹스 편집장은 “게임 원작이라고 게임의 요소를 그대로 옮기기보다 게임 속 개성 있는 캐릭터나 설정 등을 취사 선택해야 한다”며 “서로 장르가 다르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2. 영화는 ‘관람’ 게임은 ‘체험’

사실 게임과 영화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상호 작용성이다. 영화는 이미 편집된 영상, 즉 완결된 스토리텔링을 일방적으로 재생하는 방식으로 관객과 만난다. 게임은 플레이어의 판단이 스토리텔링을 이끈다. 플레이어는 게임 속 가상세계를 그저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규칙을 경험하고 체화해서 게임의 전개에 참여한다.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다양한 결말을 맺기도 한다. 이런 상호 작용성을 고스란히 스크린에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신 게임과 흡사한 연출을 통해 관객에게 마치 게임을 하는 듯한 유사 경험을 주는 시도는 가능하다. ‘니드 포 스피드’(4월 16일 개봉, 스콧 워프 감독)는 인기 있는 동명 자동차 레이싱 게임 시리즈를 영화화했다. 운전자 시점에서 계기판과 차량 내부를 비추는 연출로 마치 관객이 운전석에 앉은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경험을 선사했다. 1인칭 주인공의 시점에서 외계 괴물을 처단하는 게임 ‘둠’ 시리즈를 영화화한 동명 영화(2005, 안드레이 바르코비악 감독)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자체는 혹평을 받았지만, 원작 게임 화면을 제대로 살린 연출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3. 스토리텔링 없는 게임도 영화로

지난 10월 고전 게임 테트리스의 영화화 계획이 발표됐다. 좀 의아하다는 반응이 나왔다. 다양한 형태의 블록을 빈 칸에 맞추는 것이 전부인 게임을 어떻게 영화로 만들겠다는 건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최근에는 우주선이 외계인을 명중시켜 점수를 올리는 고전 게임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영화화 소식까지 나왔다.

이처럼 아예 스토리텔링이 없다시피 한 아케이드 게임은 언뜻 보기에 영화화가 불가능해 보이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창의적인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게임을 원작으로 삼은 건 아니지만 애니메이션 ‘주먹왕 랄프’(2012, 리치 무어 감독)는 이런 점에서 좋은 참고가 될 수 있다. 이 애니메이션에는 가상의 게임이 등장한다. 1981년 출시된 고전 게임 동키콩을 모티브로 삼아 만든 8비트 게임으로, 주인공 랄프가 사정 없이 건물을 부수면 이를 수리하는 내용이다. ‘주먹왕 랄프’는 8비트 게임 캐릭터인 랄프가 화려한 3D 게임의 세상으로 나온다는 스토리로 창의적인 살을 붙인 경우다. 게임 자체의 스토리가 없어도 빈 공간을 상상력으로 채우면 얼마든 흥미로운 결과물을 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4. 게임 팬부터 사로잡을 것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코리아 제공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코리아 제공

게임 원작 영화가 겨냥할 수 있는 중요한 관객층은 원작 게임을 직접 플레이한 게임 팬이다. 이들은 원작 게임과 영화를 비교해 가장 뜨거운 환호를 보낼 수도, 가장 통렬하게 비판할 수도 있다. 블리자드의 온라인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바탕으로 한창 제작중인 영화 ‘워크래프트’(2016년 3월 개봉, 던칸 존스 감독)는 원작에 충실한 영화화 계획을 상세히 공개해 게임 팬들의 환호를 받았다. 지난 11월 초 열린 게임 회사 블리자드의 공식 행사 블리즈컨에서 던칸 존스 감독(사진 1·왼쪽 두 번째)은 인간과 오크 족이 대립하는 게임 컨셉트에 맞춰 양쪽 세력을 비등한 비중으로 다룬다고 밝혔다. 오크 족의 장수 오그림 역을 맡은 배우 로버트 카진스키는 이 게임의 전설적인 무기인 ‘둠해머’(사진 2)를 들고 나왔는데, 그 디자인 역시 게임과 매우 유사하게 구현됐다. 게임 팬들은 자신들이 플레이어로 참여했던 게임 속 세계가 고스란히 실사 영화로 옮겨질 거라는 기대에 열광했다. 청운대 멀티미디어학과 박찬익 교수는 “게임 매니어들은 무엇보다 게임 속 비주얼이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어떻게 보여질지에 대한 기대가 큰 것 같다”고 말한다.

5. 감독이 만렙이면 금상첨화

지극히 당연한 얘기지만, 영화화를 책임지는 감독 자신이 누구보다 게임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게임은 기본적으로 경험에 기반하는 분야다. 게임을 직접 플레이하면서 감독은 자신이 창조해야 할 가상 세계를 온전히 경험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2002~)의 폴 W S 앤더슨 감독은 모범적인 경우로 꼽힌다. 그는 잘 알려진 대로 원작 공포 게임 ‘바이오하자드’ 시리즈의 오랜 팬이다. 원작 게임 시리즈가 새로 출시될 때마다 게임을하면서 얻은 아이디어를 영화에 반영시켰다. 그 결과 ‘레지던트 이블’은 현재 6편까지 제작되고 있을 정도로 인기 있는 시리즈가 됐다. 원작 게임에 대한 애정이 영화화에도 좋은 영향을 미친 경우다. ‘워크래프트’의 감독으로 처음 내정됐던 샘 레이미 역시 원작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광팬이었다. 각본을 두고 블리자드와 이견을 빚어 결국 하차했지만, 이 프로젝트에 강한 애정을 드러냈던 감독이다. 다행스럽게도 그 후임은 역시나 원작 게임의 오랜 팬인 던칸 존스 감독이 맡았다. “게임에 무지한 영화 제작자들이 영화를 만들다 보니 유독 게임 원작 영화에 실패작이 많았던 것 같다. 중요한 건 영화 제작자가 원작 게임의 ‘만렙(게임에서 최고 레벨에 도달했음을 뜻하는 용어)’ 수준의 게임 매니어가 되는 것이다.” 박찬익 교수의 말이다.

게임 원작 영화의 전설, 우베 볼 감독

도키엔터테인먼트 제공

게임 원작 영화 얘기가 나올 때마다 빠지지 않는 악명 높은 이름이 있다. 우베 볼(49)이다. 독일 출신의 영화감독인 그는 ‘하우스 오브 더 데드’(2003) ‘포스탈’(2007) ‘파 크라이’(2008) 등 유명 게임을 여러 차례 영화로 만들었다. 그때마다 원작 게임에 대한 무지와 조악한 만듦새로 게임 팬들과 평론가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흥행 성적도 처참했다.

역시 게임이 원작인 ‘왕의 이름으로’(2007)는 6000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여 전 세계에서 고작 1309만 달러의 수입을 거뒀다. 2008년 미국의 주간지 타임이 뽑은 최악의 게임 원작 영화 10편 중에 세 편이 그의 영화다. 타임이 우베 볼에게 붙여준 수사는 이랬다. “나쁜 게임 원작 영화의 마왕.” 그는 기이한 언행으로도 악명을 더했다. 아마추어 권투 선수이기도 한 그는 자신의 영화를 혹평한 평론가들에게 링 위에서 맞붙자며 2006년 이벤트로 권투 경기를 열기도 했다. 몇 년 전 블리자드 측에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영화화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거절당한 적도 있다.

글= 고석희 매거진M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