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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캠프데이비드-산장의 13일 (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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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제5일> (78년9월9일 토요일)
회담을 진행시키는 틈틈이 나는 워싱턴 행정부 일에도 신경을 써야했다. 「먼데일」 부통령이 내대신 많은 일을 해주었다. 그는 밤 시간이나 주말을 이용해 자주 캠프데이비드로 날아왔고 다른 각료들도 결재 서류 등을 들고 찾아오곤 했으나 그들은 모두 잠깐씩만 머물러 가능한 한 나의 평화 협정 작업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국사엔 거의 손 못 대>
이날은 거의 하룻 동안 양국 대표단들에게 전달하기로 되어 있는 우리의 제안을 매만지느라 보좌관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정리해야할 항목은 50개나 되었고 이들은 각각 독립된 것보다는 서로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새삼스럽게 부각된 문제들은 하나도 없었으나 항목마다 일일이 미묘한 국제법 관계라든가 과거의 협상 내용, 병력 배치, 해당 지역의 지리적 조건, 「베긴」과 「사다트」의 입장, 내 보좌관들의 양국 대표들과의 협의 내용에 대한보고, 회담을 지연시키고 있는 쟁점 등을 기억하여 정리해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측 제안의 골자는 ▲전쟁 종식과 항구적인 평화 ▲모든 국제수로에 대한 이스라엘의 자유 통행권 인정 ▲국경 문제에 대한 안전과 상호 인정 ▲관련 국가들의 정상 관계 회복 ▲시나이로부터의 이스라엘 철수 ▲이 지역의 비무장화 ▲시나이에 관한 협정 준수를 보장하기 위한 감시 기지 설치 ▲비난과 대립의 종식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 대한 팔레스타인 자치권 인정 ▲요르단강 서안으로부터의 이스라엘군 철수 ▲이집트·이스라엘간의 평화 협정을 마무리 짓기 위한 3개월의 말미 허용 등이었다.
이 제안은 또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전쟁에 의한 영토 점령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유엔 결의안 242호를 공동으로 인정하고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외교적으로 승인하며 ▲앞으로의 요르단강 서안 문제에 관련된 협상에는 요르단과 팔레스타인도 동등한 자격으로 참가시키고▲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장래에 대한 자결권을 합법적 권리로 인정한다는 것 등도 포함하고있다.
우리의 제안에는 이밖에 예루살렘에 관한 조항도 들어 있었다. 우리는 시나이에서 모든 이스라엘 정착촌을 철수시켜야하고 다른 점령 지역에서는 협상이 완전히 매듭 될 때까지 이스라엘 정착촌을 현 상태에서 동결시키도록 요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우리의 첫번째 제안에는 포함시키지 않기로 했다.

<제6일>(78년9월10일 일요일)
우리가 마련한 제안을 일요일 하오와 저녁 때 각각 이스라엘과 이집트 측에 전달하기로 했다. 전달 시간을 늦춘 것은 그사이 캠프데이비드에 틀어박혀 우거진 소나무와 회의장 밖에 보지 못한 단조로움과 지루해진 기분을 바꾸고 긴장감도 덜 겸 얼마 떨어지지 않은 게티즈버그로 짧은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였다.
「사다트」와 「베긴」은 내 차를 함께 타고 가며 전원 풍경과 「링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각국의 보좌관들도 회담 때와는 달리 매우 쾌활하게 웃고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들은 게티즈버그 군사 학교에 들러 남북 전쟁 때 미국이 서로 나뉘어 형제간에 치열한 싸움을 벌인 역사 얘기를 진지한 표정으로 경청했다. 「베긴」은 특히 「링컨」의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을 가장 짧으면서도 가장 훌륭한 내용이었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딱딱한 분위기 풀자>
하오에 돌아오는 길로 나는 「베긴」과 마주앉았다. 「먼데일」 「밴스」 「브레진스키」, 「다얀」 「바이츠만」 「바라크」 등이 동석했다. 그 모임은 이번 회담의 성패를 가름하는 중요성을 띠고 있었다.
나는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수개월간 작업을 해왔으며 이같은 노력이 실패할 경우 그 결과는 자명한 것이라고 서두를 꺼냈다. 나는 그들에게 이 제안이 형평의 원칙 아래 마련됐으나 이스라엘, 이집트 어느 쪽도 이에 대해 최종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어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평화 협정을 맺는다면 어떤 다른 아랍 국가도 이집트의 지원 없이는 이스라엘을 공격할 수 없을 터이므로 그 자체로 이스라엘에 대한 안전 보장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덧붙여 설명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 대한 주권 문제는 갬프데이비드에서는 일단 보류해두고 이스라엘 정착촌 문제와 시나이로부터의 철수 문제 등은 이 제안에는 포함시키지 않았지만 캠프데이비드에 머무는 동안 해결하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가 마련한 제안을 다 읽고 난 「베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앞서 이집트가 제시한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제안도 이스라엘의 장래를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심사 숙고할 여유가 필요합니다. 몇몇 항목은 고무적인 면도 있으나 또 어떤 것은 우리에게 시련을 강요하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제안을 검토 한 뒤에 우리의 일치된 견해를 밝히겠습니다. 아울러 이집트와 미국이 각각 제안을 했듯이 이스라엘도 자체적으로 마련한 방안을 내놓겠습니다.
그는 또 유엔 결의안 242호 내용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부했다.
나는 그의 말에 화가 치밀어 『수상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회담은 지금이나 앞으로나 어느 때고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수상의 말씀을 들으니 이스라엘은 땅만을 원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다트」 대통령의 주장을 옳다고 믿을 수밖에 없군요』라고 내뱉었다.
우리는 밤 9시30분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회담을 중단했다. 나는 그사이 「다얀」과 「바이츠만」 「바라크」가 우리의 제의를 「베긴」과 충분히 협의해주기 바랐다. 「사다트」와 예정된 저녁 회담은 다음날로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저녁 식사 후 이스라엘 측과 다시 마주 앉았으나 그 모임이 다음날 새벽 3시까지 계속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베긴」은 내용을 검토해 본 결과 진심으로 환영할만한 사항들이 많아 나의 노력에 감사한다고 입을 열었다. 그는 그러나 부분적으로 수정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이집트의 제안에 대해서는 내일 명백한 태도를 밝히고 미국의 제안은 오늘밤에 조목조목 따져보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바라크」 법무장관이 설명을 시작했으나 서두부터 유엔 결의안 242호를 삭제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나는 설명이 끝날 때까지 자제하려고 애를 썼으나 참을 수가 없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은 그런 따위의 얘기를 할 때가 아닙니다. 여러분들께서 이전에 공개적으로 유엔 결의안을 부인했다면 본인이 여러분들을 캠프데이비드로 초청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베긴」은 그러나 강하게 맞섰다. 『그 결의안은 실효성이 없는 것입니다. 이는 11년간 이스라엘이 지켜온 기본 입장입니다.

<돌아오자마자 논쟁>
나는 그들의 이같은 주장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11년간 평화를 되찾지 못한 것이 아닙니까. 처음에는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유엔 결의안을 인정한 여러분들이 이제 와서 받아들일 수 없다면 평화는 요원하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고 나는 반박했다.
그러나 「베긴」은 끝내 굴복하지 않은 채 점령지 문제를 「사다트」가 자신의 주장대로만 협상하려하고 있으며 이는 이스라엘에 위협이 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국가의 존폐와도 직결되는 것이어서 양보할 수 없다고 강력히 버텼다.
이때 「바이츠만」이 끼어 들어 다음 문제로 넘어가자고 제의했고 결국 이런 식으로 여러 시간에 걸쳐 미국 측 제안은 문장 하나 하나까지 검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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