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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2030 일터에서

"농업이 좋아 농대 나와 수박 팔아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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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직업을 ‘농업’이라 밝히면 상대방은 대개 어리둥절한다. 젊은 사람이 왜 그런 고리타분하고 낡은 일에 매여 있는가 하는 측은한 눈빛도 읽힌다. 요즘은 능력만 닿으면 자주 직장을 옮기는 세상이다. 내가 졸업한 농과대학도 어느새 생명환경대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농자천하대본’은 흘러간 옛이야기다. 외길 인생도 존경의 대상은 아니다. 그래도 나는 농업이 좋고, 이 길을 간다.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한다고요?"

"예, 수박을 팔고 있습니다!" "우하하하…."

오랜만에 동문회에 참석한 나는 순식간에 우스운 사람이 되고 말았다. 다들 수박 노점상을 연상한 모양이었다. 농업의 '농'자만 들어가도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올해 29살인 나는 농과대학을 나와 '세미니스 코리아'라는 채소 종자회사에 다닌다. 내가 맡은 분야는 박과(cucurbit:수박.멜론.참외.오이.호박 등)인데, 한국.중국.일본에서 생산되는 박과 작물 재배정보를 수집해 마케팅 전략을 세우는 일을 한다. 이제 겨우 입사 2년6개월차다.

솔직히 말하면 무슨 거창한 포부가 있어 농대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 입학 점수에 맞춰 멋모르고 들어갔다. 같은 과 동료가 모두 40명이었는데 37명이 다른 직장을 찾아 떠났다. 그나마 농협에 들어간 나머지 두 명도 금융 업무를 맡고 있으니 결국 나 혼자만 전공을 살린 셈이다. 채소 종자회사에 뜻을 둔 것도 아니었다. 나 역시 남들 다 지원하는 대기업에 도전해봤지만 관문을 뚫기가 쉽지 않았다. 인터넷 취업 사이트를 뒤지다가 우연히 눈에 띈 회사가 지금의 내 직장이 됐다.

농업은 겉으론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어렵다. 씨앗은 그 자체가 생명이다. 그 조그마한 몸안에 우주만큼이나 많은 신비를 담고 있다. 생명을 다루는 만큼 무엇보다 경험이 중요하다. 같은 종자라도 기후나 토양, 손길에 따라 천양지차의 결과를 낳는다. 농작물 짓는 과정도 잘 살펴야 하고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시장 흐름도 제때 낚아채야 한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출장을 따라다녔다. 멜론 수확 때 가위질을 잘못해 수십 개의 멜론을 땅에 떨어뜨려 "대학에서 그런 것도 배우지 못했느냐"는 꾸중도 들었다. 한국에서 기막히게 잘 자라던 수박씨를 중국 농장에 옮겨 심었더니 일조량과 토양이 달라 럭비공 모양의 수박이 나오는 황당한 일도 겪었다. 이런 사양산업에 과연 인생을 걸어야 하는지 고뇌와 번민이 떠나지 않았다.

내 일 중의 하나가 매일 오전 5시 일어나 서울 가락동 수박 경매시장에 달려가는 것이다. 이른 새벽 전국에서 올라온 수박을 만져보고 맛을 본다. 나름대로의 경매 가격도 매기면서 수박 공부를 한다. 처음 접했던 경매 시장의 살벌한 풍경은 이제 고향 같은 정겨운 느낌이 든다.

마케팅을 위해서는 현장경험이 필수다. 일 년에 6개월 이상 국내외 출장을 다녀야 한다. 해외출장도 고급 호텔 커피숍에서 바이어와 만나 노트북 컴퓨터로 일하는 게 아니다. 중국의 경우 베이징에서 5~10시간 차를 타고 들어가 허름한 시골 여인숙에 묵어야 한다. 영어도 안 통하는 현지 농민들과 직접 부딪쳐야 한다. 2년 넘게 섭씨 50도가 넘는 수박 비닐하우스에서 하루 5시간 이상 지내다 보니 까맣게 탄 피부도 장난이 아니다.

그러나 수박과 뒹굴다 보니 이제는 나도 모르게 수박을 사랑하게 됐다. 어느 사이에 흥미가 생기고 일 자체가 재미있어졌다. 한때 수박을 닮아 싫었던 내 얼굴조차 사랑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내가 맡고 있는 수박 가운데 삼복꿀수박이라는 놈이 있다. 당도가 높고 아삭아삭한 맛이 나는데, 처음에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농민들이 애지중지 키운 이 품종이 소비 부진으로 시세가 바닥을 헤맸다. 전 직원이 주말이면 할인점으로 달려갔다. 지나는 아주머니들을 막무가내로 붙잡고 시식을 부탁했다. "명품입니다. 아주 럭셔리한 수박입니다." 목이 쉬고 난 뒤에야 삼복꿀수박은 시세를 회복했다. 한동안 맥을 놓았던 농민들과 막걸리 자축 파티를 하면서 함께 기쁨의 눈물을 흘린 장면은 잊을 수 없다.

한 알의 종자가 세상을 바꾼다는 말이 있다. 내 꿈은 수박의 달인이다. 눈감고 손만 대거나 냄새만 맡아도 당도.신선도와 품종까지 알아맞히는 수박의 귀재가 되고 싶다. 종자업계에서는 적어도 10년을 넘어야 조금 안다는 대접을 받는다. 지난 2년반은 시작일 뿐이다.

우연과 우연이 겹쳐 선택한 직업이지만 이제는 한눈 팔지 않고 농민들과 어깨 걸고 이 길을 걸어갈 작정이다. 오늘도 새벽잠을 떨치고 가락동 시장으로 향한다. 사랑스러운 수박이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나형근 (세미니스 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