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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과속사회와 일본의 짚신(3)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천고마비」라고하면 이젠 누구나 풍요한 가을의 낭만을생각하지만, 본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당신도 잘 알것입니다. 그렇지요. 중국사람들은 하늘이 높아지고 말이 살찌는 가을이되면 호족들이 또 쳐들어 올것이라는 근심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입니다.
농민들은 땅에 씨를 뿌려 곡식을 가꾸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농작물은 직물이기때문에 도망다니지도 않고,또 금세 자라지도 않습니다. 침묵속에서 천천히 눈금으로 잴수도 없이 자라납니다. 식물의 수면적 상태속에서 함께 생활해온 농민들에겐 유목민들과 같은 속도가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나 짐승을 쫓는 유목민들은 언제나 말이 살찌기를 원합니다.
근대산업사회는 유목민들의 그 말이 무쇠의 기계로 바뀌는데서 부터 시작됩니다. 기차를 철마라고 부르는 것을 봐도 알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1830년 9월이었을 것임니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증기철도가 개통되어 수천명의 구경꾼이 모여들었던 영국 맨체스터의 가을은, 그리고 리버풀의 가을은 또하나의 「천고마비」가 아니고 무엇이었겠읍니까. 그리고 시속60㎞로 달리는 그 최초의 철마가 멋모르고 철길을 건너려던 「허스키슨」의원을 치어 중상을 입혔을 때, 이미 현대의 속도공해는 시작된 것입니다.
번쩍이는 그 강철의 길은 수천년간 사람의 보행속도속에서 익숙해진 그 도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슈라이버」의 표현대로 도로는 죽어버렸던 것입니다. 문명의 오랑캐들은 이제 하늘이 높아지는 계절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요란한 기적을 울리고 저 강철의 길로부터 쳐들어오는것입니다. 보리밭으로, 밀밭길로…. 그렇지요. 나그네가 구름에 달가듯이 간다는 그밀밭길로 말임니다. 아무데서나 옵니다.
그 쇳덩어리의 말들은 독침같은 말갈기를 휘날리고 하늘로부터 땅속밑으로 부터 아무리 높은 만리장성을 쌓아도, 그것들은 모르스부호처럼 날아들어옵니다. 살찐 말보다 몇배나 더빠르고 더 튼튼한 문명의 속도들은, 함부로 문지방을 넘어들어와 우리의 가슴과 머리를 밟고 폭주합니다.
이 속도의 공해는 생활의 리듬을 깨뜨리고 아황산가스보다도 독한 경쟁심으로 인간의 폐부를 썩이고 있읍니다.
물리적속도의 변화는 바로 정신적인 속도의 변화와 맞먹습니다. 들판의 그 길들은 마음속에 뻗쳐있는 내면의 길과 상통합니다. 이 슬픈 메타포를 모르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이렇게 변하게 한 것이 그 속도의 공해라는 것을 다알고 있윰니다.
오히려 처음부터 속도를 추구해온 유럽사람들은 그것에 익숙되어 있읍니다. 속도공해에 면역이 되어있고 그에대한 방비책도 있읍니다. 우리와 같이 저속문화속에서 살아온 전형적인 환경민들이 오히려 고속문명이 가져다 준 현기층과 그충격에 더많은 피해를 입은있는것입니다. 백m경주를 하듯이 뛰고있읍니다. 한발짝이라도 먼저앞서가려고 둥둠대는 모습, 초조한 모습, 짜증스러운 모습, 재촉하는 모습, 떼밀고 새치기 하고, 길이 아닌 지름길로 내딛는 과속사회의 슬픈 풍켱이 있읍니다.
이 민족이 과연 짚신발에 소매넓은 저고리와 헐렁한 바지를 입고 여덟팔자 걸음으로, 대로를 걸어다닌 군자들이었던가 믿기지가 않습니다.
속도만 있고 속도에 대한 인식은 아직 몸에 배있지않는 사람들. 그래서 속도의 경쟁만 있고 그 규칙은 없는 사회. 같이뛰어 가다가도 남에게 떨어지면 아이들처럼 『앞서가는 놈은 도둑놈』 이라고 외쳐대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겨도 정말 이긴 것같지않고 져도정말 진 것같지 않는 맹목적인경쟁 사회속에서 그저 뛰고뛸 뿐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오히려 타국인들이 세계에서 제일 서두는 과속사회의 모델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소시얼스피드의 통계에 나타난 것을보면 GNP는 몰라도 서두는 발걸음에 있어서만은 단연 우리가 세계제1위를 기록하고 있읍니다. 뉴욕의 중심부에서는 30초간에 22∼23보이고 일본동경의 은좌에서는 27보인데 놀라지 마십시오.
서울중심가에서는 무려 열발짝이다 앞선 38보라는 이야기입니다. 30초에 38발짝을 띄어놓는 맹렬한 소시얼스피드속에서 우리는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탄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발걸음이 너무 늦은것이 아니라 남들의 걸음이 너무 빠른 탓입니다.
지금 우리주변에는 암에 걸려 죽는 숫자보다도 이 속도 때문에 죽는 사람이 더많습니다. 교통사고의 사망자와 그 스트레스로 정신질환에 걸려 정신병원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속도의 오랑캐에게 유린되고 있는 과속사회에서야말로 짚신과 전나귀의 사상이 필요하게 될 것임니다. 그렇지 않으면 달리기만하고 멈출줄 모르는 이 비극의 자동차에 누가 브레이크를 달아 주겠읍니까. 속도는 경제력이나 군사력이나 권력을 낳을수 있지마는 내삶을 키우는 위대한 사상을 낳아주지는 않습니다. 가부좌를 한 사유불상처럼 생명의 사상은 정지의 몸짓을 요구합니다. 사상은 보리처럼 천천히 익어가는 것이기 때문임니다. 너무 빠른 바람속에서는 영근 곡식이 쏟아지고말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급하더라도 뒤꿈치가 없는 일본 짚신을 신지마십시으.
아내에게 꽃을 사들고 들어가기 보다는 옛 시조속에서 살고 있는 전나귀 한마리를 구해옵시다. 그리고 30초동안에 38발짝을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저속의 걸음걸이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차항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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