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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중요한 결단일수록 절차 갖춰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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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노무현 대통령이 또 한번 큰 정치적 소용돌이의 중심에 섰다. 60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국가권력 남용에 따른 범죄에 대해 민.형사 시효의 적용을 배제하거나 적절하게 조정하는 법률도 필요하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위헌 소지가 있다느니 없다느니, 형사적 시효소급은 해당 사안이 아니었다느니 어쩌니 하는 말이 무성하고 해석도 춤을 춘다.

경축사를 찬찬히 뜯어보면 해당 발언이 차지하는 분량은 노 대통령의 전체 연설 중 미미하다. 그리고 이미 1996년 특별법으로 공소시효를 연장하는 것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합헌 결정을 내렸던 적이 있다. 95년 12월에 통과된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은 12.12 및 5.18 관련자들의 공소시효를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재임 만료일인 93년 2월 24일까지 정지시키는 것을 골자로 했다. 그러니 노 대통령의 입장에선 여론의 비판적 시선이 억울하달 수 있고 대통령이 하는 일은 무조건 반대한다는 불편한 마음을 가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위헌 시비의 소지를 제공한 것은 온전히 경축사를 작성하고 읽은 측의 몫이다. 사후 약방문 격으로 일이 터진 후 문제의 본질이 호도되었다고 섭섭해하기보다는 미리 의도했던 바가 흐려지지 않도록 자문도 하고 검증도 마쳤어야 했다. 경사스러운 광복 60주년 기념 경축사가 이런 시비로 얼룩져서야 되겠는가.

그리고 대통령의 경축사가 나온 뒤 청와대와 열린우리당의 준비되지 않은 모습도 실망이다. 대통령이 누누이 강조했듯이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정부라면 이토록 중구난방일지 의심스럽다. 모름지기 60주년 광복절 경축사라면 청와대, 여당, 정부가 오랜 시간 함께 고민하고 토론해 역사에 남을 만큼 원대한 비전을 깔끔한 명문으로 담아야 할 것이다. 대통령 혼자 강원도 산자락에서 며칠간 구상하고 공식 일정도 줄인 채 밤늦게 직접 컴퓨터로 초고를 작성하는 과정을 거쳐서 나와야 할 게 아닌 것이다.

아주 흡사한 일이 불과 얼마 전에 또 있었다. 바로 대연정 발언이다. 그때도 11인회인가 12인회라는 소수에게 대통령이 깊은 고민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대중에게 공표된 대연정 발언도 실현 가능성은 차치하고 위헌 시비를 피할 수 없었다. 이에 대응하는 청와대와 열린우리당은 정리된 입장을 한 번도 제시하지 못했다. 마침내 대연정은 국민적 분란만 일으키고 유야무야 잊혀 가고 있다. 이 얼마나 유사한가. 대통령의 '나홀로 국정운영 방식'이 여간 우려되지 않는 것이다.

광복 60주년을 의미있게 보내기 위해서는 독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부둥켜 안고 가야 할 어두운 과거사를 한 번쯤은 아주 과감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러지 않는다면 한국의 과거사는, 패망 60주년에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전한 과거에 대한 공허한 반성과 사죄와 같이 항상 개운치 않게 역사의 응어리로 남을 것이다. 독일의 빌리 브란트 총리는 70년 폴란드를 방문해 잔인했던 유대인 학살에 대해 진심으로 무릎을 꿇고 사죄함으로써 미래로 나아갈 수 있었다.

노 대통령이 친일진상규명특별법과 과거사정리기본법 등을 통해 국민의 기본권이 유린된 과거 사건을 정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은 환영하는 바다. 그러나 동시에 임기의 반환점을 앞두고 자신의 전반부 과거를 곰곰 곱씹어 봐야 한다. 열심히 앞장서 일하면서 진정성을 의심받고 위헌 시비를 겪으며 결과적으로 되는 일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임기 후반에는 위헌 시비로 국론이 분열되고 역사적 과제를 수행하지 못하는 정치적 낭비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매사 더욱 시스템에 의해 국정을 운영하고 국민적 합의를 구하길 우선해야 한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