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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5. 불꽃을 따라서 <22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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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부엌 오른쪽에 안방과 마주보며 꼭 그만한 크기의 출입문이 달려 있는데 거기에 말 그대로 콧구멍 만한 방이 하나 딸려 있었다. 근호가 쓰던 방인데 연탄가스가 새어서 그가 한번 죽을 뻔한 뒤로 쓰지 않다가 내가 세를 드는 것을 계기로 구들을 뜯고 다시 놓게 된다. 근호는 그 무렵의 모든 노동자들이 그러했듯이 날마다 연근을 했다. 정시 퇴근은 여섯 시였지만 어느 회사도 퇴근 시간이나 여덟 시간 노동제를 지키는 예는 없었다. 여섯 시부터 연장 근무 세 시간을 합하여 아홉 시가 정례적인 퇴근 시간이 되어 있었다. 공단에서는 거의 모든 노동자가 일요일만 빼고는 열두 시간씩 일했다. 맞교대로 야근을 하게 되면 밤 아홉 시에 출근해서 이튿날 아침 아홉 시에 퇴근했다. 야근조와 주간조는 보통 일주일에 한 번씩 바꾸었다. 방에 들어가 앉자 문가에 엉거주춤 앉은 나를 턱짓으로 근호에게 인사시키며 강씨가 말했다.

-오늘부터 우리 집에서 같이 살 거다. 나도 네 형이나 삼촌처럼 생각할 테니 잘 지내도록 해라.

근호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의 긴 머리카락이 두 눈을 아예 덮어 버렸다. 여섯 살짜리 꼬마 순호는 이부자리를 차내고 잠들었고 그 옆에 나란히 중학생 정도로 뵈는 단발머리의 앙상한 소녀가 모으고 꼬부리고 잠들어 있었다. 어머니가 그들의 몸 위에 다시 이불을 덮어 주었다. 강씨가 아내에게 일렀다.

-소주 사홉들이 한 병만 줘 봐. 안줏감이 뭐가 남았나….

-늦었는데 그냥 자요.

-황씨가 우리 식구 되는 첫날인데 그냥 맨숭맨숭 넘어갈 수야 있나.

근호가 얼른 나가더니 쟁반에 종이컵이며 소주병과 들통에서 식은 어묵을 건져 가지고 들어왔다. 우리는 방문 주위에 둘러앉아 소주를 마셨다. 강씨는 근호가 자꾸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연상 뒤로 쓸어 넘기는 게 걸렸던지 한마디 했다.

-얀마 머리 좀 깎아라.

-요새는 군바리들이나 짧게 깎는다구요.

근호가 대꾸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며칠 후에 스포츠 머리로 짧게 깎아 버렸다. 근호는 참으로 성실한 청년이었고 내 말귀도 너무 잘 알아들어서 나는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육 개월 정도이긴 했지만 공단에서 한 달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강씨가 술잔을 들고 자울자울 졸기 시작하자 근호와 나는 담배도 태울 겸 사귀기도 할 겸 밖으로 나왔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일을 잡으려는데 어떤 게 좋을까?

-무슨 기술 있으세요?

-아무것도 없어.

근호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뭐 기술이라고 있어 봤자 아무 소용없어요. 요새는 분업이 하두 잘 되어 있고 기계도 작업장 사정대루 공장마다 다르구요 툭하면 배치가 바뀌거든요.

그림 = 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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