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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⑤여성] 50. 호주제 폐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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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4년 개최된 가두 캠페인에서 가족법 개정 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있는 이태영씨(中).

2005년 3월 2일 오후 5시.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회의장에서는 여성들의 환호성과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찬성 161표, 반대 58표, 기권 16표로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한 민법개정안이 통과된 것. 반세기 이상 끈질기게 지속돼온 가족법 개정 투쟁이 열매를 맺는 순간이었다.

호주제 폐지는 한국사회의 대전환을 예고한다. 호주제가 폐지됨으로써 2등 시민으로 남아 있던 어머니ㆍ아내ㆍ딸들이 적어도 법률상으로는 아버지ㆍ남편ㆍ아들과 같은 지위를 갖게 됐다. 또한 대물림을 위해 여아를 낙태하고 남녀의 성비가 기형적인 불균형을 이루는 일도 사라질 전망이다.

호주제 폐지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오랜 기간에 광범위한 시민참여가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그 한가운데에 이태영(1914~1998)이란 인물이 우뚝 서 있다.

최초의 여성 사법고시 합격자인 이태영은 야당인사(고 정일형)의 부인이란 이유로 판사 임용이 거부됐다. 변호사로 개업한 그는 53년 전국여성단체연합회의 이름으로 남녀평등가족법안을 제출했다.

그때는 남존여비와 남계혈통 중심의 가족제도가 당연시되던 분위기였다. 김병로 당시 대법원장은 개정안을 들고 간 이태영과 여성계 인사에게 “1500만 여성이 불평 한마디 없이 잘 살고 있는데 법률 줄이나 배웠다고 휘젓고 다니느냐”며 호통을 쳤다. 하지만 이태영은 “가족법 개정만이 여성들의 인간화와 가정의 민주화를 이뤄낼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56년 가족법 개정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한 여성법률상담소(현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세운다. 4000년을 기다렸다는 듯이 상담소 앞에 억울한 여성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그는 “한국 1500만 여성의 법적 지위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증명하는 것”이라며 가족법 개정을 위한 멀고 지난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태영과 여성단체들은 연합조직을 만들어 수백차례의 강연회와 좌담회를 열고 홍보 책자를 발간했다. 국회의원에게 전화와 편지로 호소했으며 가두 캠페인과 공청회 등도 쉬지 않고 개최했다.
이같은 운동에 힘입어 가족법은 80년대 말까지 네차례(58, 62, 77, 89년)에 걸쳐 개정됐다. 하지만 호주제와 동성동본 불혼제도 같은 근본적인 남녀불평등 조항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운동은 순탄치 않았다. 유림뿐 아니라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내는 저항 때문이었다.‘노처녀 과부집단’‘가족을 파괴하는 패륜녀’등 독설과 폭언으로 가득 찬 편지가 날아들고 “한국을 떠나라”는 협박전화도 끊이지 않았다. 유림세력과 여성세력의 힘겨루기로 인식되면서 유림단체들도 조직적인 반대활동을 펴나갔다.

2000년대 들어 한국가정법률상담소ㆍ한국여성단체연합 등 여성단체는 물론 시민단체ㆍ법학자ㆍ변호사 등이 가세하면서 호주제 폐지운동은 질적 비약을 이뤘다. 일부 여성인사는 ‘고은광순’, ‘오한숙희’처럼 부모 성 함께쓰기 운동을 통해 호주제의 부계혈통주의에 도전했다.

2005년 국회에서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한 민법개정안이 통과됨으로써 호주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53년 첫 개정안을 낸 이후 52년이라는 길고긴 시간이 걸린 뒤였다.
폐지는 많은 과제를 던진다. 우선 호적을 대신할 대안적인 신분등록제가 마련돼야 한다. 정서적 관계로서의 가족관계, 가족에서의 보살핌 노동, 가족의 위기 등을 ‘배려하는’진정한 의미의 가족정책이 시행돼야 할 때다. 전통의 재창조라는 과제도 중요하다. 가부장적 전통의 해체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서구 가족제도의 무조건적인 수용도 대안이 아니다.

한국가족법의 역사는 개정운동의 역사였다. 이 역사는 오늘 우리에게 새로운 역사를 상상하라고 말하고 있다.

양현아 서울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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